워킹제리부르스

#72 굿바이 폴

by 야생고라니

그를 처음 본 것은 Zoom 회의를 통해서였다. 영국 악센트를 가진, 레이밴 안경테를 쓰고, 늘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지닌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타 회사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 중이던 SaaS 기업의 Management 트랙으로 입사했고, 크고 작은 이슈들을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잠시나마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깊이 있고 진정성 있게 일하는 타입의 리더였기에, 직장 내 ‘로맨티스트’를 존경하는 나로서는 그를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시아 헤드로 일하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나의 보너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별도 법인으로 분리되면서, 일본을 제외한 모든 아시아 지역이 그의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나 역시 그에게 보고하게 되었고, 덕장의 면모를 지닌 그를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동시에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가족에게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주고, 나 자신에게도 커리어의 확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싱가포르 리로케이션을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싱가포르에 동일한 포지션으로 인력을 채용하는 기회가 생겼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후보들과 함께 경쟁하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폴은 한국에서 일하던 나를 싱가포르로 옮기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귀찮고 번거로운 일들을 기꺼이 처리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싱가포르로 리로케이션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변화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경영 행위의 결과로, 폴은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을 세심히 챙기던 이가, 그렇게 깊이 몰입하며 일하던 이가,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상황은 이해하지만, 마음 한켠이 아쉬웠고, 싱가포르의 탄력적인 노동시장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며칠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어렵고 아프다.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사무적’이지 않았던 만큼 나 역시 그를 ‘개인적으로’ 존경해 왔기에 더욱 그러했나 보다.

굿바이 폴.

당신의 앞날에 언제나 행운과 행복이 함께하길.

싱가포르 덕스턴 힐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 먹자는 약속, 조만간 꼭 지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