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해도 좋으니, 스스로에게 상처 내지만 말기를
내가 지난 5년 동안 만난 내담자의 연령대는
만 세 살부터 일흔여덟 살까지 다양하다.
저마다의 사연이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마음이 더 오래 머무는 건
10대, 20대 어린 친구들의 이야기다.
봄날처럼 하루하루가 싱그럽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이 어린 친구들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안은 채
쭈뼛쭈뼛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오지 않는다.
대부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온다.
13살 셀린은 내가 대학원 다니며
학교 상담사로 실습하던 시절 만난 아이였다.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아이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다.
“며칠 전 사촌 오빠가 방으로 날 부르더니 옷을 벗기고…”
복도를 지나가던 선생님이
그 얘기를 우연찮게 들었고,
신고 의무자인 교사는 즉시
아동보호국(DCFS)에 학대 의심 케이스를 접수했다.
미국에서 교사나 상담사,
의료인 등은 아동 학대 의심 정황이 있을 경우
무조건 신고해야 하는 법적 의무자(mandatory reporter)다.
이건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뤄져야 하는 절차이다.
그렇게 신고가 접수되면 아동보호국은
가정 방문, 아동 면담, 가족 조사 등 정식 절차를 밟고,
아이들은 부모의 동의 아래 학교 내 심리 상담을 받도록 안내받는다.
셀린은 처음엔 상담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저 친구에게만 조용히 말하고 싶었던 비밀이
선생님, 가족, 그리고 처음 보는 상담사에게까지
알려진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괴로워했다.
가해자인 사촌 오빠는
접근 금지 명령(restraining order)으로 집에서 분리됐고,
셀린의 집엔 경찰이 상주하며 관찰을 시작했다.
수시로 찾아오는 사회복지사의 면담,
매일같이 조사를 받는 게 반복이 되었다.
하지만 셀린을 더 힘들게 한 건 가족이었다.
“동네 창피하게, 괜히 그런 얘기를 해가지고...”
엄마는 피해자인 셀린을 꾸짖었다.
그날 이후,
셀린은 비자살적 자해(Non-Suicidal Self-Injury)를 시작했다.
자살할 의도는 없지만,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해
셀린은 자꾸만 날카롭고 뾰족한 것들을 찾았다.
그녀는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다니고,
점점 말이 줄고,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실습을 마무리하게 되면서
셀린과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지금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잘 지내고 있었음 좋겠는데…
21살 아일린.
강박장애(OCD)와 중증 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꽃다운 나이의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자해를 시작했고
팔은 흉터로 뒤덮여있었다.
계속되는 자해에,
엄마의 손에 이끌려 상담실에 왔지만
첫 다섯 달 동안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내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했고,
10분이 지나면 얼른 나가고 싶은지
문 쪽만 바라보며 다리를 떨었다.
그녀와의 상담은 길어야 15분이었다.
그리고 18살 조던.
교정기를 낀 채 해맑게 웃던 그는
“사실 나, 남자를 좋아해요,”라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열었다.
그는 커밍아웃 이후 학교에서 괴롭힘을 심하게 당했다.
결국 자살 시도를 하다 병원에 입원을 했고,
퇴원하며 아빠 손에 이끌려 내게 오게 된 거였다.
그의 손목엔 채 아물지 않은 진한 상처가 그대로 보였다.
말보다 선명하게 그의 고통을 보여주는 자국이었다.
이 친구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린 게 뭐가 그리 고민이 많냐고요?
나도 힘들고 싶어서 힘든 게 아니에요.
어리다고 삶이 더 쉽진 않아요.
나도 나만의 고통이 있다고요.”
내담자들이 어릴수록 더 자주, 더 명확하게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상담사의 역할이다.
SNS 속에서 그들의 자존감은 늘 시험받는다.
클릭 한 번이면 나보다 더 예쁘고 잘난 사람들이
끝없이 보이는 세상에 아이들은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비교의 늪은 깊고,
그 늪에서 아이들을 꺼내 줄 어른이
곁에 없다면 그들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런 어린 친구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들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것이다.
거창한 심리치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그들은 조금씩 달라진다.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그 작은 기분이 곧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존감은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자라난다.
그 마음이 생기면,
스스로를 상처 내는 행동을 자연스레 그만두게 된다.
15분도 못 버티던 아일린은
이제 1시간을 꽉 채워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엔 내 팔에 있는 흉터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있든 말든, 누가 보든 말든.
근데 요즘은, 그 흉터를 보면
나한테 너무 미안해져요.
앞으로는 나에게 미안할 짓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게이란 이유로 괴롭힘 받을 바에
죽는 게 낫다던 조던은
손목 흉터 위에 연꽃 타투를 새겼다.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나로, 당당하게 살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나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상담실 문을 연다.
누군가의 고통이 너무 이른 계절에 찾아오더라도,
따뜻한 햇살 하나쯤은 비춰주고 싶어서.
부디 아이들이 스스로를 어여뻐하며
자신을 누구보다 단단히 안아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가장 단단한 마음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