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설레고 말았다
그 이후 그는 놀랍도록 달라지기 시작했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대마초를 같이 피우던 친구들을 조금씩 멀리했다.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모델로서 필수인 자기 관리를 본격적으로 했다.
매주 상담 때마다 그는 전보다
더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삶의 의욕이 없던 얼굴이 생기를 되찾아갔다.
어느 날, 패션 화보 촬영이 끝나자마자 온 그는,
장발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멋진 슈트를 입고 나타났다.
평상시보다 다른 모습에 내가 "오늘 멋있네!"라고 말했더니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알아? 너 만나고 내 인생이 바뀌었어.
넌 상담사를 넘어서 내게 라이프코치 같은 존재야.
내가 나중에 유명해져서 TV쇼에 나가면
꼭 너의 이름을 언급할게.
그만큼 너는 내게 너무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야."
순간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설명할 수 없는 이 묘한 감정을 뒤로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이 모든 건 네가 그동안 적극적으로 상담에 참여한 결과야.
스스로에게 꼭 칭찬해 줘.”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꿔서 안 될 꿈을 꾸었다.
그와 내가 분위기 좋은 펍에서 술을 마시며 데이트하는 꿈이었다.
서로 은근한 스킨십을 하고 플러팅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불킥을 했다.
이런 죄스러운 꿈을 대체 왜 꾼 거야.
그날부터 그와의 상담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내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설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기에, 슈퍼바이저에게 상의를 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내담자는 누구한테도 말 못 했던 상처와 치부를
상담사에게 드러내야 하는 입장이고, 매우 취약한 입장이야.
상담사는 그런 내담자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를 돕는 사람으로서,
내담자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게 돼.
그 과정에서 상담사는 연민, 동정, 그리고 때론 로맨스 감정이 생기기도 해.
사실 이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지극히 정상적이야.”
이렇게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느끼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역전이 (counter‑transference)라고 한다.
역전이가 일어나는 건 매우 흔하고 정상이지만,
적절히 대응을 해야만 한다.
"그 내담자하고 만날 때마다 너 스스로
감정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경계 설정을 확실히 해야 해.
즉 상담사-내담자의 경계를 명확히 지켜야 해.
잘 알고 있겠지만, 내담자하고의 로맨틱한 관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허용이 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감정 조절이 힘들고 견디기가 어려우면,
그가 다른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해."
그와 상담을 한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는 더 이상 술과 대마초에 빠져 살지 않는다.
모델로서 자리도 잡혔고, 이쁘고 착한 여자친구도 생겼다.
인플루언서로도 꽤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
치료목표(treatment goals)를 도달한 그에게
축하하다는 말과 마지막을 알렸다.
그는 마지막 날 꽃다발을 들고 왔다.
"덕분에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어.
지금까지의 상담 잊지 않을게."
문을 나서며 그는 뒤돌아 말했다.
"2년 후엔 우리 상담사‑내담자 사이 아닌 거다?
그땐 꼭 밖에서 만나자. 밥 대접하게 해 줘."
상담사‑내담자 관계가 끝나고 최소 2년간은
로맨스 관계를 맺지 않도록 하는
The 2‑year Rule이라는 전문 윤리 기준이 존재한다.
그걸 두고 한 말 같았다.
그건 도대체 어디서 듣고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는 마지막까지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는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담자의 취약함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더욱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선
자기 인식과 감정 조절, 지속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그는 내게 가장 어려운 내담자 중 하나였다.
아니, 어쩌면 내가 가장 성장하게 된 내담자였다.
그를 통해 나는 상담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더 단단해졌다.
상담실의 문 너머에서,
나는 매 순간 흔들렸고 스스로를 붙잡아야 했다.
감정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책임 없는 감정은 위험이 된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내 자리에서 나의 역할을 지킨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끝까지 내담자를 위하기 위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