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감염망상 (delusional infestation)
그녀를 처음 본 건 한여름 오후였다.
밖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하지만 그녀는 기모 후디에 겨울 바지에,
긴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얼굴 절반을 가릴 만큼 큰 선글라스,
그리고 머리와 볼은 손수건으로
꽁꽁 가려져 있었다.
잠시만 스쳐 봤다면 파파라치를 피하는
유명인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손수건 사이로 젖은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더워 보였고, 불안해 보였다.
상담실은 에어컨 바람에 꽤 시원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더우면 에어컨 더 세게 틀 수도 있어.
그리고 마실 물이 필요하면 편하게 말해줘.”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에어컨도, 물도 이걸 죽이지 못해.”
‘이걸?’
그 순간, 공간의 온도가
살짝 낮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진단명은
피부감염망상(Delusional Infestation).
몸속에 벌레나 박테리아, 곰팡이 같은 것이
기어 다닌다고 확신하는 증상이다.
그녀는 수차례 병원을 전전했다.
피부과에서도, 피검사받은 내과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의사들은 다 거짓말을 해.
이렇게 가렵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게
느껴지는데 왜 자꾸 아니라고만 해?”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려 애썼지만,
말끝마다 떨림이 묻어났다.
이미 올란자핀(Olanzapine)이라는
항정신성 약물을 복용 중이었고,
정신과 전문의는 상담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우리 상담소에 보낸 상황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 나를 정신병자처럼 대해.
내가 마약중독자인 줄 알아.”
그리고,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박스를 꺼냈다.
테이프로 조심스럽게 봉해진 박스를 열자,
안에는 먼지, 각질, 머리카락 조각 같은 것들이 빼곡했다.
빛을 받자 그중 몇 개는 붉은 실타래처럼 반짝였다.
“봐. 이게 내 몸에 살고 있던 벌레들이야.
보이지? 나만 보이는 거 아니잖아.”
그녀는 다급하게 장갑을 벗었다.
손등과 팔에는 붉게 일어난 상처 자국들이 얽혀 있었다.
피부는 거칠었고, 건조해 갈라진 곳이 많았다.
표백제나 소독제 특유의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하루에도 난 수백 번 씻어.
비누, 손세정제, 표백제, 알코올…
다 써봤는데도 얘네들은 죽질 않아.
계속 기어 다녀.”
그녀의 엄마와 언니는 다 착각일 뿐이라며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녀는 매일 화장실에서 몰래
온몸을 ‘소독’한다고 했다.
그녀의 씁쓸한 얼굴은 그새
억울함과 외로움으로 번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박스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며 말했다.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으면…
이렇게 하나하나 모아서 가져왔을까.
정말 힘들었겠다.”
그녀의 고통을 ‘사실’로 확정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느낌만큼은 온전히 인정하고 싶었다.
그녀는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내 말을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피부에서 그런 느낌이 들면
누구라도 이유를 찾고 싶어 져.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야.
그러니까 우리, 같이 알아보자.”
그제야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기대가 비쳤다.
우선 그녀와 나는 우선적으로
피부 보호부터 시작했다.
소독제와 표백제 사용을 줄이는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했다.
조금씩 진전이 보일 때
그녀에게 하나의 숙제를 내주었다.
"네 몸에 있다는 미생물들이
네 감정과 말투를 안다고 했지?
그럼, 그들에게 편지를 써보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말로 풀어보는 거야."
다음 상담 때, 그녀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왔고,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외로울까 봐,
슬퍼할까 봐 붙어있던 거라면…
이젠 그만 가도 돼.
내가 우울할 때 넌 더 날 괴롭혔어.
표백제를 부어도 넌 더 날뛰었어.
근데 요즘은 운동도 하고,
긍정확언도 하고,
가족들과 자주 놀러 다니며 웃다 보니…
넌 잠잠해졌어.
그때 알았어.
넌 실체가 없다는 걸.
넌 내가 만든 감각 괴물이야.
그래서 이제 말할게.
난 네가 필요 없어.
이제 난, 자유로워질 거야.”
편지를 다 읽은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공기엔 땀 냄새도,
소독제 냄새도, 두려움도 없었다.
“나 이제 두렵지 않아.
감각이 다시 찾아오면…
그건 내가 나를 더 잘 돌봐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려고 해.”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믿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날 그녀에게서 배웠다.
상담자는 때로 ‘치료자’가 아니라
‘증인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
설명하거나 바로잡으려는 조급함보다,
한 사람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껴주며 함께 버티는 일이 먼저라는 것.
그녀가 들고 온 작은 박스는
벌레의 증거가 아니라,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치열한 기록이었다.
그걸 알아봐 주는 것만으로,
그녀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다.
두려움이 한 뼘만큼 물러서고,
신뢰가 아주 작게 스며들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내게도 오래도록 남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