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고도 그리운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엄마한테 화가 날까?”
30대의 한 여성 내담자가 울먹이며 말한다.
엄마를 향한 분노가 매우 컸다.
50대의 또 다른 여성 내담자도 똑같이 얘기한다.
근데 그들은 말한다.
이상하게 죄책감도 같이 든다고.
그래서 더 괴롭고,
그 괴로움 끝엔 분노가 또 기다리고 있다.
분노 - 죄책감 - 괴로움 - 분노 - 죄책감 괴로움 …
늘 한 바퀴를 돌아 결국 같은 곳에 멈춰 선다.
많은 여성 내담자들이
이 순환 구조를 가지고 상담실에 들어온다.
어릴 땐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고,
그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착한 아이’,
‘엄마의 자랑’이 되려고 무던히 애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말을 잘 듣고,
실수하지 않고, 늘 씩씩하게.
'골든 차일드(golden child)'였던 그들에게
그건 사랑받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엄마의 시선 한 줄기라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딸 잘했어"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어서,
자기 욕구와 감정을 밀어 넣고
'엄마의 기대'라는 옷을 입었다.
그러다 좀 더 커서 알게 된다.
그 옷이 너무 무겁고,
나한테 맞지도 않았다는 걸.
그리고 이제는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엄마에게 화가 날까?"
"그런데 왜 또 그게 미안한 거지?"
이런 내담자들의 공통된 정서엔
‘구분되지 않음’이 있다.
엄마의 감정과 내 감정이 구분되지 않고,
엄마가 슬프면 나도 슬퍼야 할 것 같고,
엄마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죄책감.
이걸 심리학에서는
분화(differentiation) 부족이라고 부른다.
‘분화’는 간단히 말해 ‘내 감정은 내 것,
엄마 감정은 엄마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이 부족하면,
딸은 엄마의 감정에 이끌려 살게 된다.
엄마가 원하는 내가 되려다 보니
진짜 나는 점점 작아지고,
나중엔 내 욕구가 뭔지도 모르게 된다.
그런 내담자들에게 내가 자주 전하는 말이 있다.
“분노는 사랑받고 싶었던 증거야.”
그 말에 많은 이들이 울음을 터뜨린다.
그동안 분노를 ‘나쁜 감정’,
‘부모에게 품으면 안 되는 감정’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분노는, 내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건 곧, 원하는 것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랑, 인정, 따뜻한 말 한마디 같은.
엄마에게 화가 났던 건
엄마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상담실에서 이 주제로 함께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감정 분화 작업이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일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죄책감, 어디서부터 배웠을까?”
“엄마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그 차이를 느껴볼까?”
또 한 가지는,
내가 엄마로부터 얼마나 인정받고 싶었는지
그걸 충분히 말로 표현해 보는 작업이다.
누군가는 “엄마, 나 힘들었어”
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어릴 때도 한 번도 못 했던 말이다.
어쩌면 평생 못 할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상담실에선 해볼 수 있다.
그 말 한 번으로 마음속 매듭이 풀리기도 한다.
결국 상담의 끝은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엄마에게 받고 싶던 말,
"잘했어," "괜찮아," "사랑해"를
이제는 내가 나에게 해보는 연습도 한다.
내가 나의 '좋은 엄마'가 되어주는 것.
그게 분화의 시작이다.
엄마와의 감정적 거리두면서 동시에
엄마를 ‘한 인간’으로 보는 눈을 갖는 것,
이 과정이 중요하다.
다시 한번, 어느 관계에서,
“왜 이렇게 이 사람한테 화가 날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그 관계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랑, 인정, 존중,
혹은 단지 이해받고 싶은 마음, 등.
엄마와 딸 사이에서든,
아빠와 아들 사이에서든,
연인, 부부, 친구 사이에서도
감정의 분화는 꼭 필요한 작업이다.
분노는 관계의 끝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바랐던 무언가의 시작점일 수 있다.
그 시작은 멀리 있지 않다.
내 마음 안에서 천천히, 다시 열 수 있다.
기억해 주길.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을,
나를 사랑해 주는 마음으로 다시 열 수 있다는 걸.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