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20분 전, 한 통의 전화를 받다
때는 작년 이맘때였다.
연말이라 상담실은 평소보다 한산했고,
창문 밖 보이는 길거리에는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한결 따뜻해진 분위기였다.
연말이면 상담실은 평소보다 잠잠해진다.
연휴가 많아 가족들 및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확실히 덜 찾아온다.
그날도 그런 평온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숨 좀 돌리고 있었다.
따뜻한 펌프킨 초코라테를 마시며
그간 밀린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금요일이고, 퇴근까지 20분.
기분이 좋은 금요일 오후였다.
근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슈퍼바이저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직감은 때로 설명보다 빠르다.
‘아, 뭔가 왔구나.’
“긴급 케이스야.”
그는 인사도 생략한 채 말했다.
“오늘 아침 OD*로 입원했다가 방금 퇴원했대.
자살 충동이 심한데 병원에 자리가 없어서
약 처방만 받고 나왔어.
지금 만나보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아.”
*OD: overdose; 약물과다복용
솔직히 유쾌하진 않았다.
‘왜 하필 금요일 퇴근 시간에…’
그래도 지금은 긴급 상황,
나도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런 케이스는 전화를 안 받아도,
받아도 심장이 조여 온다.
안 받으면 ‘혹시 벌써 무슨 일이…’
라는 상상이 최악으로 치닫고,
받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바로 상담 모드로 돌입해야 한다.
심장이 두 번 피곤해지는 순간이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작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18살 베일리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며칠 남지 않은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다.
아이의 아빠는 같은 학교 다니는
남자친구였고,
그는 ‘내 일 아니야’라고 발을 뺐다고 했다.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말의 무게가 너무 컸고,
그 무게를 이기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다.
두려움, 외로움, 절망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온 오늘 낮,
베일리는 충동적으로 진통제를
한 움큼 삼킨 것이었다.
다행히 가족이 빨리 발견해
병원에 데려갔다.
그 말을 하면서 베일리는 계속 울었다.
그녀가 두려워한 건 죽음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건,
부모님이 이제 모든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무서웠겠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내 전화를 받아줘서 고마워.
너만 괜찮다면, 조금 더 얘기해보고 싶어.
지금 사무실로 올 수 있을까?”
그녀에게 지금 이 시간이 ‘황금시간’이었다.
위험은 지금 가장 가까웠고,
도움은 지금 가장 필요했다.
베일리는 금세 사무실로 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봤다.
눈가엔 마른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그 자국이 오늘 하루를 다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조명을 켜고, 물컵을 건넸다.
조금 진정되길 기다린 뒤,
자살위험 스크리닝(suicide risk screening)을 시작했다.
자살 시도를 한 직후에는
반드시 현재 충동 수준을 확인해야 한다.
계획이 있는지, 방법이 있는지,
위험한 도구가 집에 있는지,
혼자가 되는 시간이 많은지도 확인한다.
“혹시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나는 천천히 물었다.
베일리는 고개를 저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니요… 근데, 겁이 나요.
또 그런 생각이 들까 봐.”
그녀의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
나는 계속 질문했다.
“혹시 예전에도 그런 생각 든 적이 있었니?”
“단 한번도요. 오늘은 순간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녀가 대답할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씩 안정되는지,
흔들리는지 주의 깊게 들었다.
그녀의 대답 속도, 호흡, 초점 흐림까지
최대한 꼼꼼히 확인했다.
다행히 충동은 지나갔고, 계획도 없었다.
이번 시도는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패닉에 가까웠다.
당장 5150*을 발동해야 할 정도의
지속적인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5150: 자·타해 위험 시 강제 입원 조치
안도의 숨을 쉬고 우리는,
자살 예방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갔다.
밤새 혼자 있지 않기, 위험 약품 치우기,
가족과 체크인 간격 정하기,
위기 대응 번호 저장하기, 등.
베일리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안정된 타이밍을 보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뱃속의 아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베일리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낳고 싶어요. 근데…
엄마 아빠가 절대 허락 안 할 거예요.
남자친구도 다 끝내자고 했고…
그래서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아요.
너무 외로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지금 당장 혼자라고 느껴질 뿐이야.”
그 말 이후, 베일리는 아주 작게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목이 잠겨서.
나는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그녀에게 하나씩 설명했다.
무료 산전 검진 클리닉, 학교 내 상담 프로그램,
법적 보호 안내, 부모와의 대화 중재,
아기 양육 선택지를 함께 검토하는 프로그램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강조했다.
베일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에는 아주 작은 희망과
엄청난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었다.
어느새 창 밖은 어두컴컴했다.
어둠 속 전구 불빛은 유난히 따뜻했고,
마치 세상이 곧 기쁨으로
가득 찰 거라는 듯 반짝거렸다.
이때 누군가는 가족들을 만나러 가고,
선물 포장을 고민하고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외로움과 절망에
베일리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거다.
베일리와의 상담은 특별했다.
한 사람의 목숨과, 한 생명의 시작이
동시에 걸려 있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들떠 있었고, 거리는 반짝였지만,
나는 그리 밝지 않은 상담실에서,
한 소녀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곁을 지켰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오래도록
그들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
너무 오래 아파하지 않게.
너무 외로워하지 않게.
너무 괴로워하지 않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