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결함이 아닌, 정체성입니다
나는 회사에서 굳이
내 청각 장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이유도 없고, 혹시라도
무선 이어폰처럼 생긴 보청기를 보고
"통화 중이야?"라는 말이라도 들을까 봐.
아니면, 그냥 노래 듣는 줄 착각할까 봐.
그래서 긴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리고 다니는 게 편하다.
지금도 동료들은 모른다.
그날 상담실에 들어온 홀리는
대학생이었고, 공황장애로
약을 복용 중인 내담자였다.
“수업 시간에 숨이 잘 안 쉬어져.
과제도 기한 맞춰 내는 것도 힘들고...
혹시 진단서 써줄 수 있어?”
그녀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기에
당연히 써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서류를 받아 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이런 생각이 도움 안 되는 건 아는데...
진짜 쪽팔려. 나만 망가진 장난감 같고...
왜 하필, 난 이렇게 태어난 걸까.”
눈물은 말보다 먼저 와 있었다.
나는 그 서러움을 안다.
아무도 모르게, 오래 겪어온 감정이었다.
대학원 시절.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던 때에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워
교수님께 조심스레 털어놨다.
“제가 귀가 잘 안 들려서요.”
교수님은 ‘장애 서비스’를 신청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장애학생지원센터를
찾아갔고, ‘도와달라’고 말해야 하는
그 상황이 왠지 낯부끄러웠다.
그 이후 실시간 자막을 제공해 주는
필사자가 나와 함께 수업을 다녔다.
그녀는 늘 내 옆에 앉아
자막을 적어주었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괜히 눈치가 보였다.
심지어 한 학생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너 농인이야? (Are you deaf?)”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예 안 들리진 않고,
다행히 보청기 덕에 어느 정도는 들어.
조아나(필사자 이름) 덕분에
수업 진도 따라가는 것도 문제없고.”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
집에 가서 한참을 울었다.
그래서 홀리의 말이 남 얘기 같지 않았다.
홀리는 내게 이어 말했다.
“나는 선생님이 너무 부러워.
전문직에, 아마 멋진 남편과 결혼해서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큰 집에
선생님 닮은 이쁜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이 공황장애도 없잖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홀리, 우리 이제 꽤 친하니까
내 얘기 하나 해줄게.
나 결혼은커녕 남자친구도 없고,
지금도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아.
그리고 난 청각 장애를 갖고 있어.”
홀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귀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올렸다.
“무선 이어폰 같이 생긴 이거 내 보청기야.
초등학교 때부터 썼고,
이거 없으면 거의 아무것도 못 들어.”
“... 진짜? 상상도 못 했어.”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며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장애는 조금 불편한 거지, 부끄러운 건 아니야.
물론 나도 여전히 아직도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려.
누가 수군거릴까 봐.
근데 홀리는 날 보며 장애도 없고,
멋진 삶을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잖아.
그렇더라.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속으론 누구나 뭔가 하나쯤 안고 살아.
그게 청각 장애처럼 눈에 보이는 장애든,
마음의 병처럼 보이지 않는 장애이든.”
그날 밤,
홀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선생님 얘기 해줘서 고마워.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어.’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균열을 품고 산다.
누가 봐도 멀쩡해 보이는 얼굴 너머엔
보이지 않는 울음이, 말 못 할 상처 있다.
그저 '괜찮은 척'하며 사는 것뿐.
우리는 각자의 고장 난 부분을
애써 감추며 살아간다.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보다
모른 척 웃는 게 더 쉬울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장애를 ‘결함’이나 ‘한계’로만 바라본다.
마치 그것이 누군가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벽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나는 안다.
장애는 그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장애가 있는 상담사로 있으면서
‘불편함’ 속에서도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빛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날 홀리에게 내 이야기를 꺼낸 건
용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보청기가,
누군가의 약봉지가,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하루가,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기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