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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혹시 사이코패스인가?

‘정서적 단절’

by 전민교

"나는 감정을 잘 못 느껴.

슬픔도, 분노도, 불안이 뭔지도 실은 잘 몰라.

친구들은 날 보고 계산적이라며

사이코패스 같대.

뭐, 그런가 보다 했어.

근데 이런 내가 너무 이상해서,

고치고 싶어서 왔어."


깔끔한 셔츠 차림의 30대 중반의

어셔는 스스로를 공감 능력이 낮고,

행동은 지나치게 계획적인 편이라 했다.


사람들은 ‘정이 없다’며 그를 쉽게 떠났고,

어셔는 정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했다.


나는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것 같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다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사이코패스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다던데.
그럼 애기 때부터겠지.”


그런 그에게 말했다.

“그럼 못 바뀐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


그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포기하라고? 사이코패스로 그냥 살라는 거야?”


“이미 본인을 사이코패스라고 믿고 있잖아.
정확히 말하면, ‘사이코패스’의 공식 용어는,

반사회적 성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야.


나는 조용히 짚어줬다.
“공감 안 되고, 죄책감도 없고,

거짓말은 치밀하고 반복적으로 하고…
타인을 도구처럼 여기며,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고,

규범을 어기고, 죄책감도 없어.
그게 반사회적 성격장애,

즉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이야.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해?”


그는 잠시 멈춰 생각했다.
“… 그건 아니야. 근데 감정이

거의 없고 공감 안 되는 건 맞아.

그게 괴로운 거야.

만약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난 왜 이런 거야?”


우리는 함께 그의 인생을 되짚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그의 가족, 친구, 연인, 직장 관계를 살펴봤다.


그는 전형적인 ‘감정 학대’의 피해자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화날 때마다,
“그런 건 드러내면 안 되는 거야”

라는 소리를 들으며 컸다.


감정을 숨기는 건, 그에겐 생존이었다.
‘느끼지 않는 척’은 가장 안전한 방어였다.


갈등은 곧 관계의 파탄이었고,
속마음을 내보이는 건 상처를 의미했다.

그는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걸 바로 정서적 단절(emotional cutoff)라고 한다.


그는 그가 가족들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을 공유했다.

“별거 아냐.”
“난 상관없어.”
“그냥 넘어가도 돼.”


문제는, 자꾸 넘어가다 보면
내 마음도, 남의 마음도 안 보인다는 거다.


상대방은 정서적 벽을 느끼고 멀어지고,
본인은 점점 더 ‘느끼는 법’을 잊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넌 사이코패스가 아니야.
너를 지켜낸 생존 전략으로

정서적 단절을 선택했을 뿐이야.

즉, 이건 과거의 너를 보호했던 방식이야.”


어셔는 내 눈을 피하며,

연신 다리를 떨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 게

보였지만, 애써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


1. 감정 인식 훈련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것' 구별하기.

- 예시:

"방금 ‘별거 아니야’라고 말한 건,

불안해서 거리를 두려는 거였구나."


2. 감정 표현의 연습
자기 전, 솔직하게 감정을 짧게 글로 쓰기.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예시:

"상담사가 '정서적 단절'에 대해

얘기할 때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안했다."


3. 신뢰 기반 만들기
감정을 드러내도 안전한 사람 만나기.
조금씩 마음을 열며, 진짜 유대감을 회복해 가기.

-예시:

늘 그 자리에서 날 믿고 기다려주는 여자친구


아직도 감정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을 어색해하는 그이지만,

그는 매일매일 조금씩 자신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있다.




'난 감정이 없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어쩌면 그건,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이 '너무 커서' 견디기가 버거워

회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차단하고 피하는 게
최선의 전략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피한 게 아니다. 참고 견딘 거다.


‘정서적 단절’은,

망가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한때 너무 아팠던 내가

살기 위해 만든 가장 용감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은 그만해도 괜찮다.


차갑고 이성적인 얼굴로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버틴 걸로,

충분하다. 이젠 자유로워져도 괜찮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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