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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나 사이에서

작가 전민교

by 전민교

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


같은 LA지만,
예전보다 훨씬 넓고 조용한 집이다.
개인 세탁기도 있고, 넓은 창고도 있고,

회사와도 가깝다.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더 쾌적한 곳으로 옮겼으니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며 계획을 이것저것 세웠다.


인테리어도 직접 시도하고,

책도 더 읽고, 영상 편집도 하고,

부동산, 주식 공부도 하고,

자기 계발 관련 챌린지도 하고,

SNS도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전쟁 같던 이사가 끝났는데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넓어진 방이 이상하게 어색하고,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몸도 쑤시고

화장실도 잘 못 간다.


그렇게 한가득 품었던 계획들은

자꾸만 미뤄졌고, 나는 무기력해졌다.


심리상담사로 일하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 꽤나 민감한 편이다.
그런데 내 감정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하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둔감하다기보다 애써 무시한다.

무기력이 내 안을 잠식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걸 오랫동안 회피하다 결국,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환경이 나아졌는데 난 왜 이렇게 게으른 거지?”
“새로운 곳에서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냐?”
“맨날 계획만 세우고, 왜 실천은 안 하는 거야!”


그리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만약, 지금의 나 같은 내담자를 만났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했겠지.


“그럴 수 있어요. 지금은 잠시 쉬어도 괜찮아요.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 말이 매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주위에선 나를 ‘열정적인 사람’이라 한다.

상담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글도 쓰고,

다양한 도전을 하는 날 보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진취적으로

사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사실 나 꽤 자주 무기력해.
어쩔 땐 아예 퇴근하면 침대에 누워

배 긁으면서 과자만 엄청 먹는데…’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내가

꽤 다른 것 같았고, 그게 너무 괴로웠다.


나도 남들이 보는 ‘나’가 되고 싶은데,

내가 아는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나도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고 싶은데...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저,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 일뿐이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하고 싶은 게 많아도 귀찮으면

‘언젠간 할 거야’라며 미루고,

한없이 게으름을 피운다는 차이.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나는,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는 괴로운 상태이다.


마치 창이 너무 커서 오히려 눈이 너무 부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게 실망하게 된다.
난 진짜 게으른 인간인 건가?

의욕이 없나? 정체된 걸까?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라는 사람은 열정이 넘칠 때는

정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하고,

쉬고 싶을 때는 게으름도 피우며

충분히 쉬는 사람이다.

그게 ‘나’인 거다.


막막하면 그 막막함을 견디고,

우울하면 그 우울함을 견디고,

불안하면 그 불안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게 딱 ‘나’다.


어딘가 꽂히면 밤낮이고 붙들다가,

시들해지면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 무기력해지면 푹 쉬고,

다시 열정이 생기면 또 열심히 한다.


그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잔인할 만큼 제대로 배워가는 중이다.


이 집도, 이 마음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정직한 풍경인지도 모른다.



KakaoTalk_20251130_203340693.jpg 이사 첫날. 지금봐도 무지 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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