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레나의 밤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관중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그 잔향은 멀리서도 따라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빈 좌석들이었지만, 그 공백조차 가득 차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줄은 몰랐다. 예매가 시작된 지 며칠 만에 대부분의 표가 팔려나갔고, 대회를 앞둔 이주 전엔 모든 좌석이 사라졌다. 고초록 부장이 단톡방에 올려주는 실시간 판매상황을 보면서 나는 지인 하나 초대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손으로 쥘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해설석에 앉은 그날,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눈 앞에 펼쳐진 대형 스크린과 링. 마치 장을 보러 나선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가 시장 좌판에서 떼를 써서 샀던 만화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이 사라질까자 애써 눈에 힘을 주던 그 심정이 들면서 또다른 상념이 왼손 잽처럼 안면을 스쳤다. 어쩌면 이건 나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 애써 세운 성에, 우연히 초대받은 손님처럼 느껴졌다. 내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해설자로서의 나와, 선수였던 나 사이의 거리가 잠시 낯설었다. 내 옆에 자리한 홍석현 캐스터와 낮츠 해설위원을 한번씩 쳐다봤다. 산전수전을 겪은 그들도 이런 역사의 현장에 하나의 조각으로 자리한 것에 꽤나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 무대는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무대를 완성한 건 수백 명의 손과 수만 번의 호흡이었다. 선수들이 있었다. 조명과 음향을 조율한 연출진, 뒤편을 지탱한 자원봉사자들, 정성으로 채워진 식사 한 끼까지. 모두가 이 밤을 함께 만들었다. 이건 분명, 공유된 기적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링 위는 말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몸이 곧 언어였다. 낙법은 설명이었고, 점프는 감탄이었다. 어떤 문장은 로프 위에서 완성되었고, 어떤 대사는 침묵 속에서 전해졌다. 나는 그 감정을 해설이라는 언어로 통역했다. 마이크 너머로 감정의 흐름을 옮겼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스컴독이 객석 2층 난간에 올랐다. 관객석은 숨을 죽였다. 아니 그러다가 내연기관의 압축후 폭발처럼 엄청난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대,공포가 뫼비우스 띄처럼 엮인 형태로 KBS아레나를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시간은 느려졌고, 충돌은 정확했다. 그것은 증명이었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있어야만 이 쇼는 완성된다.
행사가 끝난 뒤, 홀로 객석을 거닐었다. 조명이 꺼진 자리에는 누군가 남긴 피켓, 쓰러진 물병, 잔잔한 먼지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틈을 걸으며 다시 배가 고파졌다. 해설이 아닌, 움직임으로 말하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뭐를 하지? 나는 그런 걸 느낄 틈이 없었다. 아직 나는 내 2막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첫 막의 커튼이 막 내린 지금, 다시 링을 향해 걷고 있을 뿐이다. 누구도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내 안의 허기가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경기장을 나와 회식장소인 상수김치삼겹살로 향했다. 땀냄새와 아드레날린이 섞여있던 곳을 벗어나자 심박수가 가라앉고 식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링 닥터 고은산 선생이 손가락을 건너편 병원을 가리켰다. "사고 터지만 저 병원으로 이송하려고 했어요" 우리 둘 다 그 말에 웃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만약 정말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삼겹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밤공기를 탐색하며 걷는 짧은 산책은 없었을 것이다. 6차선 너머에 있는 부민병원 너머로 달이 보였다.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의젓하게 밤을 책임지고 있었다.
레슬러들이 모였다. 스탭들이 모였다. 급식왕 식구들이 모였다. 다 같이 모여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5월 24일 복싱대회 출전 때문에 금주를 해봤는데 그 리밋터가 오랜만에 해제됐다. 영어,일어,프랑스어,중국어 등등 건배라는 외침속에 몇 개국어가 청각을 자극했는지 모르겠다. 여기가 '발할라'구나. 혼자 키득대며 고객을 마셨다.
"제가 입문할 때 제가 맨 뒷자리였는데 이젠 제가 맨 앞자리네요"
옆에 있던 고 선생에게 한마디 건내고 카운터 쪽에서 가게 안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누가 보면 시에스타 성당의 벽화를 쳐다보는 관광객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감탄과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기적에.
카톡 택시를 불렀다. 음주 후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수순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흔들리는 차안에서 안전벨트를 메자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버클이 단단히 체결되는 느낌이 들자 무슨일인지 다시 또다른 목표가 떠올랐다.
언젠가, 부상을 확실히 이겨내고 다시 서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낮은 자세로, 더 단단한 의지로 그 링에 오를 것이다. 그때는 저 회식장소인 테이블을 두고 술을 마셨던 레슬러들이 모두 나의 적이 될 것이다.
이건 나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밤이었고, 모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시작 위를 다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