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연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라디오DJ로 입문해 해설자로 때로는 방송진행자로 분야는 다르지만 오랫동안 말로 먹고살았고, 누군가 앞에 서면 어김없이 말을 풀어낼 수 있었다. 카메라앞에서 쫄지 않는다는것은 80년대 초반 우연히 KBS카메라의 거리 인터뷰에 응했을 때 부터 이미 확인된 터였다. 강연은 내가 이기는 나만의 전장이었다.
그게 나의 착각이었다. 서울, 신논현역.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역사의 한복판, 대형서점이 운영하던 작은 공간이 있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숨결과 발걸음, 책장을 넘기며 눈만 굴리는 무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첫 실패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시작됐다. 그 공간은 쉼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실은 쉼 없는 소음의 요람이었다. 나를 초대한 서점의 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여긴 누구든지 앉았다가 나갈 수 있어요.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하라고? 그건 고문에 가까웠다. 마이크는 없었고, 조명도 없었다. 앞에서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정류장처럼 떠나는 이들과 도착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혼돈. ‘유동인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눈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리되지 않은 문장을 꺼냈고, 청중은 정리되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50분이 그렇게 흘렀다. 아니, 흐르지 않았다. 시간을 뜯어보면, 그것은 수천 조각의 정적과 당혹, 그리고 내내 이어진 내 혼잣말이었다. 강연이 끝났을 때, 박수도 없었다. 말없이 흩어진 이들의 뒷모습만 남았다.
그날 밤, 나는 맥주를 땄다. 캔을 쥐는 손이 차가웠다. 나는 캔맥을 들이키며 CSI라스베가스가 나오고 있는 TV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길 그리섬 반장이 사건현장의 흉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난 자신감이란 이름의 유리잔이 깨져 있었다. 거울처럼 나를 비추던 그것은, 이제 날카로운 파편으로 내 안을 찔렀다. 며칠 후,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저기서 다시 해보자." 그곳은 최악의 무대였다. 그렇기에 최고의 훈련장이 될 수 있었다. 거기서 해낼 수 있다면, 어디서든 가능할 것이다. 나는 서점에 다시 연락했다. 이번엔 조건 없이, 무료로, 연습 삼아 강연을 하겠다고 했다.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살아남은 스파르탄 용사가 되자. 얼굴을 비롯 온몸에 상처가 생기겠지만 그 상처는 날 다 웅혼한 존재로 만들것이다. 아무렴. 그렇게 두 달 동안 강연을 했다.
첫 주, 다시 정신이 아찔했다. 내 말은 공기 중에 풀리지 않고 튕겨 나왔다. 둘째 주, 말이 꼬였다. 파워포인트 순서도 놓쳤다. 셋째 주, 한 청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넷째 주, 누군가 강연이 끝나자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섯째 주, 청중 중 몇몇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여섯째 주, 나는 나도 모르게 농담을 던졌고, 웃음이 터졌다. 일곱째 주, 흐름이 생겼다. 여덟 번째, 나는 말을 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분위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열 댓 권 남짓 내 책을 사가는 독자도 생겼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말이 중요하다고 믿었지만, 말은 도구일 뿐이다. 청중과 내가 공유하는 리듬, 시선, 호흡, 그것이야말로 강연의 본질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파워포인트는 부차적인것으로 진짜 강연은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사람들과의 조율로 완성된다.
실패는 괴롭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실패를 직시하면, 거기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약점은 이거야. 이걸 보강하면, 넌 더 나아질 수 있어." 강연이란 결국 연습이다. 무대 위의 번쩍이는 조명보다, 신논현역 지하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이제 안다. 어떤 말보다 중요한 것은 청중의 눈빛이며, 어떤 원고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몸에 새겨진 리듬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자기 무대에서 말을 한다.
누군가는 교실에서, 누군가는 회의실에서, 누군가는 자녀 앞에서. 그 무대는 언제나 이상적이지 않다. 소란스럽고, 불친절하고, 주목받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 진짜 강연이 시작된다. 나는 그날의 실패가 없었다면, 이 감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말한다. 실패는 쉼표다. 그것은 멈춤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점에서 다시 걸었다. 그리고 이젠 안다. 혼란의 한복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법을. 에베레스트 셰르파처럼 나는 짐을 이고 간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며, 내가 감당할 무게다. 그리고 나는, 그 무게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