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아직 있을 때는 괜찮다.
하지만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이 태양이라는 존재의 은혜를 잠시 내려둬야 하는 일몰이 시작되면, 내일 있을 전쟁이 드디어 현실로 자각된다. 권투시합. 가장 원초적인 격투기. 그 앞에 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의식을 앞둔 짐승처럼 가만히 숨을 죽인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아무것도 도망칠 수 없다.
장비를 점검하고 글러브를 말리고, 입술 안쪽의 상처를 혀끝으로 쓰다듬는다. 복싱화의 오른쪽 앞꿈치만 심하게 닳았다. 오른손 카운터를 칠 때 발목을 회전시켰다는 것이다. 괜한 으쓱함도 잠시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경기이자 의식이고, 제사이며 또한 심문이다. 내 모든 삶이 이 링 위에서 다시 한번 증명되어야 하는 재심과도 같다. 판결은 이미 내려졌을지도 모르지만, 난 다시 그 법정에 오른다. 내 피로, 땀으로, 숨소리로 항소한다.
생활체육인데 굳이 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전용 락커룸도 없고 화려한 입장퍼포먼스나 등장음악도 업다. 하지만 모든 싸움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내가 처절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넥쏘의 시동을 켠다. 촉매가 수소를 분해하자 전기가 발생되고 모터가 돌자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비춘다. 하지만 일산으로 가는 길을 빛으로 가득채우기엔 역부족이다. 오늘 밤은 도로는 바다다. 등 뒤에서 밀려오는 수천 톤의 어둠이 내 등을 떠민다.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내가 링 위에서 싸우는 그 순간, 나는 인간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와 싸운다.
모비 딕은 고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의지의 환영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하브는 그것을 추적하며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내일 만나야 할 고래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나를 향해 헤엄쳐 오고 있다. 물살을 가르며, 숨을 죽이며, 내 턱을 향해 달려든다.
주먹은 단순하다. 그러나 고결하다.
말도, 핑계도, 변명도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서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남는다. 맞았는가. 버텼는가. 쳤는가. 쓰러졌는가. 그것뿐이다. 내일 나는 그 간결한 문장 속에 내 생을 문단처럼 눕힌다. 내 인생이 세 줄의 시라면, 그 마지막 행은 언제나 주먹으로 끝난다.
나는 감정적이다. 이 감정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나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화시킨다. 불순물 없는 긴장만이 남는다. 그 안에서 나는 나다.
내일, 벨이 울리면 나는 피쿼드호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나로서.그 어떤 이유도 아닌 존재 자체로서.
그리고 나는 나만의 고래를 향해, 주먹을 날릴 것이다.
- 인간어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