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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토나이트, 나의 금성 텔레비전

by 김남훈 해설위원



어둠과 음악이 눅눅하게 얽힌 엘피바(LP Bar) ‘영도다방’의 한쪽 구석에서 나는 시간을 보았다. 시간이 물질이라면 저런 모습일까. 1970년대 후반에 생산되었을, 미닫이문이 달린 금성(Goldstar) 흑백 텔레비전. 육중한 나무 몸체에 네 개의 매끈한 다리가 달려, 마치 가구처럼 기품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아직 세상을 배우기 전, 우리 집 안방을 묵묵히 지키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원래 없던 술자리였는데 친구 김승현의 부름을 받고 자리에 나갔는데 귀한 분들의 모임이었다. 동아리 선배들의 술자리에 처음 나간 신입생 마냥 쭈볏쭈볏 거리며 진빔에 콜라를 타다가 저 텔레비젼의 존재를 눈치 채게 된 것이다.


저 갈색 상자 텔레비젼이 비추던 세상의 첫인상(사실상 유일한)은 선명하고도 서늘하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올려다본 화면 속, 한 국가 지도자의 죽음이 검은 활자로 아로새겨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복을 입은 단단한 모습의 다른 사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선언했다. 아이는 그 의미를 몰랐다. 다만 거실을 채우던 어른들의 무거운 침묵과 불안의 냄새로, 세상에 어떤 균열이 생겨났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 시절, 텔레비전은 종종 기쁨보다는 슬픔과 불안의 창구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불안한 시절을 살아가던 나의 부모님은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젊음은 하루하루의 성실한 노동과 건강한 땀 냄새로 증명되었다. 온종일 일하고 돌아와 저녁상에 마주 앉은 그들의 얼굴에는 고단함보다 내일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고, 세상은 어지러웠지만 두 사람의 세계는 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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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일요일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오른다. 아버지는 송탄 파라다이스 유원지에서 열린 충북향우회 야유회에 다녀오셨다. 지금은 지도 위에서 사라진 그곳,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고기 굽는 연기로 자욱했을 그 공간에서 아버지는 경품으로 무려 냉장고를 타 오셨다. 당시로서는 복권 당첨에 버금가는 행운이었다. 그날, 골목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이웃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막걸리 잔을 부딪쳤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그 향우회를 이끌던 이가 가수 박완규 씨의 부친이었다고 한다. 한 시대의 단면이란 이렇듯 기이하고 사소한 인연들로 촘촘히 엮여 있는 것이다.


나는 홀린 듯 텔레비전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4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만져본 나무의 감촉은 서늘하고 단단했다. 미닫이 문짝의 격자무늬를 가만히 세어보았다. 몇 칸이었을까? 서른네 칸.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시간의 중력이 나를 아득한 과거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이제 그 시절, 냉장고를 받아 들고 아이처럼 웃던 서른 초반의 부모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심지어 그때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란 이토록 무심하고 절대적인 것인가. 한 인간의 생애를 통째로 삼키고도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흐르는 것인가.


슈퍼맨이 자신의 고향 행성에서 온 광물, 크립토나이트를 마주했을 때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사람들은 크립토나이트의 방사능이 슈퍼맨의 세포를 파괴하여 그를 약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본다. 지구의 약한 중력과 노란 태양 아래서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칼-엘(Kal-El). 그에게 크립토나이트는 단순한 약점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고향의 중력’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그 돌멩이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신과 같은 슈퍼맨이 아니다. 크립톤 행성의 평범한 과학자 조-엘의 아들, 보통의 행성에서 보통의 삶을 살았을 ‘칼-엘’이라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모든 능력을 잃고 한낱 필멸의 존재로 추락하는 그 순간, 그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아주 미세한 안도감이나 기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영웅의 운명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잠시나마 벗어던지고, 지극히 평범했던 고향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경험.


내 앞에 놓인 이 낡은 금성 텔레비전이 나에게는 크립토나이트다. 그것은 나의 육신을 약하게 하지는 않지만, 내 정신을 45년 전의 시간 속으로 무장해제시킨다. 어른으로 살아오며 쌓아 올린 경험과 지식, 냉소와 체념의 갑옷을 순식간에 녹여내고 나를 그 시절 부모님의 아들로, 외할머니의 손주로 되돌려 놓는다.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 밀려드는 것은 상실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가능했던, 부모님의 젊음이 온 세상을 지탱해주던 시절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과 가슴 벅찬 기쁨이다.


영도다방의 스피커에서는 유재하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의 크립토나이트를, 나의 시간을, 나의 사라진 고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네모난 상자 안에서는 여전히, 나의 젊디 젊은 부모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김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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