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 모두 금쪽이였어
최근에 TV에서 요즘 육아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갑자기 가족들이 눈물이 터졌다. 그날 여섯 명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사는 집에서 넷째 아이에 대한 고민을 가진 부모가 방송에 나왔다. 겉으로 너무나 화목해 보이는 이 집에서는 넷째를 둘러싸고 작은 트러블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고, 부모는 답답해했다. 가족들은 모두 넷째가 경쟁심이 많고 유난스럽다고 했지만, 관찰카메라를 통해 차분히 지켜보니 아이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가족 안에서 겉돌고 있었다. 아이는 너무 억울해서 화를 내며 삐지곤 했는데, 울면 울수록 가족들의 마음은 멀어져갔다.
화면을 지켜본 오은영 박사는 엄마가 아이와 성향이 반대여서 친해지지 못했을 거라고 캐치했다. 덜 아픈 손가락이 아니라, 그저 조금 덜 친한 아이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 후 우리는 로봇의 질문을 통해 아이의 속마음을 듣게 된다. 아이는 엄마한테 첫 번째로 사랑받고 싶은 아들이 되고 싶은데, 엄마는 나를 가족 중 일곱 번째로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참 해맑게 대답했다. 알고 보니 늘 엄마가 집에 왔을 때, 현관으로 제일 먼저 달려가던 아이는 넷째였다. 그걸 지켜보던 금쪽이 엄마는 스튜디오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승부욕이 강하고 하고싶은 것도 많은 금쪽이를 보면서 나는 우리 집 앵두가 떠올랐다. 그리고 미운오리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비버샘의 셋째도 떠올랐다. 또 초등학교 시절 내 모습도 떠올랐다. 엄마와 할머니한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물건을 일부러 어질러놓고는 삐져서 울기만 했던 30년 전 또 다른 금쪽이였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오 박사는 늘 해결 방법을 말하기 전에 금쪽이 엄마의 어린시절에 대해 물어봤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현재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마음이다. 어른들도 한때는 누구나 금쪽이었다. 엄마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안기고 싶었던 금쪽이었다. 나의 결핍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결국 문제를 더는 바깥에서 찾지 않고,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오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아이는 생각과 감정이 다른 존엄한 타인’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자신과 아이의 성향에 대해서 알고, 그게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남은 과제는 아이와 조금 더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꼴찌로 사랑받고 있다는 넷째는 엄마와 비밀편지를 주고받으며 할 말이 많아졌고, 더 많이 엄마에게 안길 수 있었다. 그렇게 고작 2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아이는 당당하게 ‘엄마는 나를 첫 번째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밝게 웃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린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존재다. 그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지금도 뭔가를 이뤄 보려고 발버둥 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사랑, 내 혈육’이란 말을 듣고 싶어서 오늘도 진상을 부리며 유난을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부모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부모를 사랑한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 손을 놓아도 아이는 금세 다시 잡는다. 금방 용서해준다. 아이의 용서가 어른을 죄책감에서 구원한다.” 오은영 박사의 한 인터뷰 기사를 보다가 이 문장에서 한참을 멈췄다. 맞다. 진짜 아이들은 부모를 용서할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계속 식탁에 앉아있다. 어제 함부로 했던 말을 후회하고, 제멋대로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어느새 식탁에 앉아 엄마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찾는다. 가끔은 내가 그 손을 빨리 잡지 못한 어른이라는 게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다녀왔냐고, 따뜻할 때 저녁 먹으라고 왜 먼저 말 걸어주지 못했을까.
글을 쓰면서 문득 앵두가 내 생일 때 거창하게 만들어준 판넬 편지가 생각났다. 내 사진과 캐릭터 스티커, 색종이, 실로 꼼꼼하게 장식해서 편지를 쓰고, 효도 쿠폰까지 직접 만들어준 정성스러운 선물을 받고는 갑자기 두 눈이 빨개져서 한참 동안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가장, 너무너무너무 사랑해 정말”
이 문장을 오랫동안 보면서 여러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란 사람이 ‘사랑해’라는 말로도 부족해서 앞에 온갖 형용사가 등장하는 편지를 받아도 될만한 사람인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부끄러웠고, 한없이 삶에 겸손해졌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삶에 붙잡아주고, 살아가게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제일 가장 너무 사랑하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