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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pr 10. 2021

두 가지 마음

대안학교를 다닌다는 것(2)

대안학교는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배움을 느끼게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한 고개를 넘었더니 또 한 고개가 눈앞에 다가왔다. 앵두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반에 여학생이 없다고 해도 호기롭게 학교에 갔던 앵두의 배짱은 1학기를 지나지 못하고 꺾여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전체 학년이 56명 정도인 상황에서 선택 수업이 많다고 해도 다른 학년 언니들과 친해지기도 쉽지 않았고, 같은 학년의 남학생들도 한창 까칠하게 사춘기를 겪고 있어서 누가 누굴 돌보거나 배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작은 우물에서 때때로 아이들은 관계에 힘들어하고 답답해 했다. 가온나무(중2과정) 시절에는 아이가 정말 많이 외로워한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나이 때 마음이 맞는 또래 친구가 얼마나 큰 행복을 줄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 시기에 아이는 내게 많이 의지했다. 우울할 때면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전화를 걸었고, 집에 올 때 전철에서 울면서 전화를 걸기도 했다. 길 학교에서는 봄 여름에 꼭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앵두는 두 번 정도의 여행에서 3박 4일 정도 있다가 중간에 돌아오곤 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끝까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보내고는 앵두를 데리러 안동이나 괴산에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힘들게 학교 앞까지 갔다가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경계를 풀고 편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학교에 없으니 아이 마음은 점점 더 고립돼 갔다. 그래도 다행히 길 학교에는 아이를 계속 관찰하고 공감하며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멘토샘뿐 아니라 다른 교사들과도 아이의 어려움에 대해서 상담할 수 있었고, 방법을 같이 찾아볼 수 있었다. 아이 마음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통합교사샘이 학교에 있는 앵두를 감사하게도 계속 지켜보며 챙겨주셨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이면 연락을 따로 주시곤 했다. 한밤중에도 문자로 아이에 대한 고민을 샘과 나눌 수 있었고, 직접 샘들과 만나서 앵두가 학교에 잘 적응하며 다닐 방법을 연구해보기도 했다. 솔직히 ‘학교를 중간에 포기해야 하나’ 그런 마음이 매 학기 생겼고, 아이와 그 문제로 여러 번 실랑이했지만, 다시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중도포기를 보류하는 시간이 연장됐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들 때가 있다가도 가끔 좋을 때가 생겼고, 이제는 진짜 포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어김없이 다시 반짝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 시간이 몇 십번이 반복되고, 이제 학교 안 가겠다는 말이 이력이 날 때쯤 되면, 드디어 평화로운 날이 찾아온다. 아이가 큰나무(중3) 과정 후반기 들어가면서부터는 그만둬야겠다는 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생겼고, 뽀족한 친구들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자존감이 생겼다. 뭔가를 애써서 해보고, 그 결과를 자랑스러워하는 경험이 쌓여갔다. 글을 쓰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인지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큰나무 때는 다른 대안학교를 탐방해보기도 하고,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를 정해서 직접 페이퍼를 써보고 발표를 해보는 과정이 있었다. 교사의 지도 아래 대학생 때나 할만한 과정을 직접 진행하는 아이들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딸은 디즈니 프린세스 공주 캐릭터들에 대한 분석을, 어떤 친구는 레고를 이용해 작품 사진을 만들기도 했다. 뮤지컬, 축구, 자동차, 디자인 등 모두 각자가 좋아하는 것들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과정 자체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퍼 발표회를 지켜보는 부모님들 눈에서 함께 견뎌낸 시간에 대한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솔숲(고1) 때는 여러 주제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을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때 ‘길찾기’란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계획대로 하루를 규칙적으로 살면서,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방학 때 따로 갖게 된다. 앵두는 그 시간을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길찾기>에 와서 얻게 된 건 매일 같이 하루를 잘 채우는 연습을 하게 된 것 같아.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오늘을 잘 열고, 잘 보내고, 잘 느끼며, 잘 닫는 연습을 하고 있어. 매일매일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처럼 의식하고 힘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리 살아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길학교 솔숲 과정에서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며, 자신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지나온 길을 생각하고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하며, 지금의 내가 또 다른 시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을 글로 떠올려보는 시간이 한 시절을 이해하고 자신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는 작은 치유의 시작이 됐다. 솔숲 에세이를 통해 앵두는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섰을 때의 흔들림과 현재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 길, 배움터길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길찾기>에 와서 깨달은 것 같아. 나는 이 길을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어.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엔 ‘애(愛)만 존재할지 모르지만, 진짜 경험 안에는 애와 증이 함께 공존하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어쩌면 그게 성숙한 사랑일 수도 있잖아. 아름다운, 못 가본 길을 아쉬워하지 않고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을 성숙하게 사랑해야겠어. 

나는 과거의 내 모습보다는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진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살아오면서 수많은 어려운 순간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해. 내가 바라온 대로 그냥 쉬이 살아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참 행복하다고 느낄 때쯤, 또 새로운,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나타나곤 해. 그런 순간에 아마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거야. 지금의 내가 없었을지도 몰라. 계속 내 안에서 나를 자책하고 있었다면, 나를 감싸는 부정적인 기운이 날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을 거야.

언제 어떤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전보다 더 나은 순간을 보내려면 내가 더 단단해져야 하고, 별것 아닌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느낄 정도의 넓은 마음이 필요할 거 같아. 마음의 여유는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래서, 나에게 “너는 어떻게든 보란 듯이 잘 될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어. 아주 잘 말이야! 그렇게 초초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너는 꽤 많은 걸 해냈어. 그러니까 너무 힘겨워하지 말고 예민해져서 많은 것들을 놓치지 말라고 해주고 싶어. 세상을 크게 보라고 말이야. 사실 수 마디의 말들보다 그냥 진하게 안아주고 싶어!"


이 글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나는 눈물을 훔쳤다. 어떤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우리가 함께 버텼던 시간들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흔들리며,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시간, 모든 것을 다시 리셋하고 처음부터 쌓아 올렸던 시간들이 아프고 아름답게 떠올랐다. 영화 '컨텍트'의 시간관념 처럼 우리가 처음과 끝의 시간을 통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어떤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게 될까. 조급해 하지 않고,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고 지금 이순간을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을까. 계속 뒤를 돌아보며 또 다른 길을 생각하며 후회하는 대신,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맞잡고 콧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어서, 언제 피웠는지 모르게 봄날 아침에 얼굴을 내민 분홍 꽃송이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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