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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pr 30. 2021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을래

소녀들이 외모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며

가끔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소녀들한테 ‘예쁘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항상 그 말을 하자마자 후회를 한다.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소녀들은 그 말을 듣기 위해 더 예뻐져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거 같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녀들은 예쁨이 사회적인 기준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다. 굳이 모두가 TV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얼굴이 인형 같고 몸매가 여리여리할 필요가 없는데, ‘예쁘다’는 말을 하게 되면 왠지 그런 전형적인 미의 기준을 칭찬하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사실 어른들이 자주 쓰는 ‘예쁘다’는 표현에는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사람의 특정한 행동과 태도가 보기 좋다는 표현도 들어가 있기도 할 텐데, 왠지 요즘은 그 말이 입에서 나올 때면 ‘아차’하는 생각이 든다. 워낙 청소년들은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 말 하나하나를 검문하게 된다. 나도 할머니들처럼 ‘예쁘다’는 말을 ‘우리 강아지’하는 식으로 습관처럼 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우리 강아지’가 훨씬 낫지 ‘예쁜 아무개’라는 말은 바람직한 어휘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사람의 노력과 상관없는 어떤 외적인 부분에 내 선호와 평가가 담기는 것 자체가 좋지 않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꼭 자신이 예뻐서 사랑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듯해서 멈칫하게 된다.


그리고 때론 ‘예쁘다’는 말 자체가 특정한 사람이 가진 다채로운 장점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재단해버리는 말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 실제로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는 친구들도 외모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다른 고유한 재능과 성품 등으로 인정받고 싶을 것 같다. (실제로 한 소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예쁜 게 전부인 사람은 아닌데. 그냥 그냥 예쁘고 착한 애로만 나를 보는 시선이 싫어.”)


물론 지금 10대 소녀들이 외모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꼭 모두가 큰 눈에 쌍꺼풀이 있어야 하고, 얼굴형이 달걀처럼 갸름하고 작을 필요가 없는데, 소녀들의 미의 기준은 참 엄격하다. 코는 너무 커서도 낮아도 안 되고, 몸매는 걸그룹처럼 빼빼 말라서 아동 사이즈의 교복도 넉넉히 맞아야 하고… 이 좁은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모든 소녀는 성형수술을 해야 하고,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한창 잘 먹을 나이에 배고파 쓰러지지 않을 정도만 위를 채우는 일상이 반복된다. 실제로 청소년 공간에 있어 보니, 몇 그릇씩 밥을 리필해서 먹는 남자아이들에 비해 함께 식사할 때도 밥을 안 먹겠다고 말하는 여자 친구들이 많은 편이다. 1년 전 밥을 두 그릇씩 먹던 소녀가 몇 달 사이에 자신은 원래 밥을 싫어해서 과자를 먹는다고 말하는 걸 보면, 왠지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이미 충분히 날씬한데도 무조건 지금보다 더 말라야 한다는 생각이 굳게 있어서 이젠 맛있는 음식을 봐도 먹고 싶다는 욕망마저 마비돼 버린 것 같아 좀 슬퍼진다.


물론 사춘기를 겪는 많은 아이들이 주변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크든 작든 느끼고 있다는 걸 안다. 청소년들이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산다는 거 생각만큼 쉽지 않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의 외모를 너그럽게 바라봐 주는 것처럼 나 자신도 그런 눈으로 바라봐 주면 어떨까. 볼이 통통한 친구의 얼굴을 귀여워하고, 눈이 작은 친구의 선량한 눈매를 사랑하는 것처럼, 거울 속의 나 자신도 그렇게 여유롭게 바라봐 주면 어떨까. 


나는 그저 나로서 내 삶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면 된다. 굳이 남이 보는 내 모습까지 신경 쓰고 전전긍긍하며 살기에는 지금 주어진 삶이 너무 아깝다. 나는 내 삶을 지금 현재 1인칭으로 살고 있다. 사실 거울을 보거나 사진을 찍지 않는 한 내 얼굴이나 몸매를 나 자신이 볼 일이 없다. 아마 거울이나 사진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외모 때문에 지금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았을 거다. 1인칭의 나로 세상을 관찰하고 바쁘게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지내다 보면, 굳이 3인칭의 나를 생각하며 고민할 시간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많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친척들이 떠드는 이야기도, 반 친구들의 외모 험담도 사실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한 안줏거리에 지나지 않을 거다. 타인이 상처를 받든 말든 아무 생각 없이 떠든 말들에 휘둘리고 쓰러져 자신을 부정하기에는 우린 너무 소중한 사람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한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다.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사춘기는 하나씩 ‘나’를 수집하고 ‘나’를 알아채는 연습을 해보는 시간이다. 아마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기 위한 오랜 여행을 하겠지만, 지금의 나를 너무 홀대하거나 함부로 대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통통하고 해사한 얼굴로 이 골목을 뛰어다닐 시간은 아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내 삶'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을 테니까. 혹여라도 30년이 흘러 사진앨범을 보고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그때 늘 통통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예쁘고 반짝였었구나. 왜 그땐 그걸 몰랐을까. 


음악을 작곡하는 친구 배이화가 작년에 동요 앨범을 냈는데, 노래 중 ‘나는 나답게’라는 곡이 있다. 

“나는 나답게 나는 나답게 /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지 / 마음의 씨앗을 키우는 건 / 바로 내가 할 일이야. / 나는 나답게 나는 나답게 / 누굴 따라하는게 아니지 / 나라는 그림을 그려갈 때 / 제일 나답게 그릴거야” 

‘나는 나답게’라고 몇 번이고 확신을 주는 그 동요를 듣던 아침,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의미를 왜 마흔이 넘어서 깨닫게 됐을까. 누구처럼 예쁘지 않으면 어떤가. 누구처럼 그럴싸한 직업과 능력이 없으면 어떤가. 그냥 나답게 지금 이 순간을 자유롭게 살면 된다. 나답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 그 마음의 씨앗을 키워가는 건,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그건 지금의 내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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