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한글문서 날아가는 현타 극복법
어제 딸이 학교 과제로 5시간 동안 썼던 에세이 한글 화면을 그냥 닫아버리는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딸은 한글 빈문서에 에세이를 a4 3장 정도 쓰다가 이제 그만하겠다고 나왔고, 나는 컴퓨터 끈다고 정신줄 놓고 엑스 엑스 계속 눌러버렸다(평소에는 강박적으로 저장을 몇 개씩 해놓는데, 그땐 머리에 뭐가 씌었나 보다 ㅠㅠ). 너무 깜짝 놀라서 어떻게든 다시 복구해 보려고, 옆에 있던 아들까지 힘을 합쳐서 2시간 넘게 초집중하며 복구할 방법을 다 시도해 봤는데, 아무리 해도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5만 원짜리 복구 프로그램까지 사려고 신용카드 번호를 누르고 있었는데, 지켜보던 아들이 '진짜 그건 아닌 것 같다'며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2시간 정도는 더 삽질을 했을 거다.
사고나기 전 1시간 정도 딸 근처에 누워서 녀석이 머리 쥐어뜯으면서 괴롭게 글 쓰는 걸 지켜봤기 때문에, '아 진짜, 이건 한 달 구박각이다' 생각하고 풀 죽어 있는데, 얘가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옛날 같았으면 울고불고 난리 났을 상황인데, 웬일로 집이 조용하다. 그러다 방구석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딸은 이미 이 최악의 상황을 인정하고는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 메모장에 에세이 글을 다시 쓰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서 설거지하면서, "내가 진짜 면목이 없다. 죽을죄를 지었다"며 불쌍한 척을 잔뜩 했다.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딸아이 에세이를 도와줄 수 있는 생각과 문장들을 마구 생각해서 몇 마디 떠들었다. 다행히 써먹기 좋은 근사하고 어려운 단어가 나왔다며, 딸이 '딜레마', '악순환' 등의 단어를 메모장에 적었다.
안 그래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걸 너무 싫어하는 애가 온종일 '나는 진짜 앉아서 뭘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며 종일 괴롭게 썼던 글이 홀라당 날아갔는데, 딸이 생각보다 심하게 좌절하지 않아서 나는 좀 얼떨떨했다. 심지어는 얘가 컴퓨터 앞을 벗어나서 메모장에 글을 쓰니 생각이 더 자유로워졌다며, 정리 안 되던 에세이 내용과 흐름이 보인다며 딸이 미친 긍정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히려 불안해지려는 찰나, 앵두가 이 상황에 마침표를 찍는 한 마디를 했다. "나 화가 안나. 이제 사춘기가 지나갔나봐."
그 순간, 나도 이상하게 꽉 막혀있던 뭔가가 뚫린 기분이었다. '얘가 이제 이 정도 좌절감과 스트레스도 해결할 수 있구나' 그런 기특함도 있었고, 뭔가 삶의 지혜 같은 것도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전에는 나도 분명히 딸이 컴퓨터 앞에서 글 쓰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도와줄 수 있는 얘기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막상 원래 글이 완전히 없어지니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이 샘솟는 거다. 딸도 원래 썼던 글이 아까워서 그 틀을 못 벗어나고 거기만 계속 맴돌고 있었는데, 막상 빈털터리로 남게 되니, 상투적이었던 생각들이 싹 다 갈아엎어지면서 새로운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나도 안다. 이거 내가 너무 미안해서 막 나 혼자 절실하게 당위를 부여하는 것인지도….)
어쨌든 이 짧은 해프닝은 다시 '0'에서, 첫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일들이 가진 이상한 신비함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애초에 보관할 것들이, 여지를 남길 것들이 다 사라지면, 깨끗하게 휴지통을 후련하게 비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미련조차 남길 대상까지 다 사라지고 나면, 그때 비로소 내가 놓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그 순간 어느새 전체가 보이고, 새로운 방법과 시각이 열린다는 것.
뭔가 손에 너무 움켜쥐고 있지 말아야겠다. 오래 애쓰던 일도 깨끗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전전긍긍할 시간에, 플랜 B를 향해 눈을 돌려 봐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툴툴 털고, 일단 거꾸로 누워서 한숨부터 돌려야겠다. 새로운 렌즈를 끼고, 새로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한 땀 한 땀 다시 만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