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쓴 에세이 과제를 읽다가
어제 딸이 대안학교에서 장기인턴쉽 과제로 쓴 에세이를 한번 좀 교정해달라고 보여줬다. (그렇다. 지난 주 내가 정신없이 한글창을 닫다가 홀라당 날려 버렸던 그 에세이다. 지은 죄가 커서, 밤 11시가 넘었지만 기꺼이 수정해 주겠다고 글을 받았다) 아이가 춤 연습 하면서 중간에 틈틈이 썼던 글이라, 프롤로그만 봤을 때는 솔직히 지난주 썼던 글보다 좀 울퉁불퉁하고 매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부터는 조금 어색한 문장들이 있긴 했지만, 글 자체가 재밌었다.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쓴 글이 아니라, 진짜 자기 생각과 고민이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하면서 드러나 있었다.
딸이 에세이 쓰면서도 너무 어렵다고, 항상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드러누워서 괴로워했었는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진짜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고민들은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으니까. 삼단논법과 인과론이 순서에 맞게 이어지는 세계가 아니니까. 여러 예술 종사자들의 이런저런 고민이 담긴 인터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서론, 본론, 결론으로 딱딱 정리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딸을 통해서 들었던 예술을 전공한 분들의 삶은 모두 치열했지만,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고민이 한창 많은 상태였다. 예술은 순수할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다른 세계보다 더 공정하지 않은 룰이 적용되는 것 같고, 예술로 먹고사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처럼 소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운처럼 보였다. 여성 예술가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몇 안 되는 분들은 주변 친구들이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고 다른 분야의 직장을 찾거나, 결혼을 통해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 뒤에야 취미로 예술을 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봐 온 것 같았다. 그 길을 가겠다고 시작했던 주변 친구들이 한 명씩 떠나거나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고, 선생님들 스스로도 불안정한 길 앞에 서서 보이지 않는 길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예술가들의 삶과 진로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딸의 장기인턴쉽은 신기한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예술로 지속할 수 있는 밥벌이는 매우 좁고 운이 좋아야 된다는 것, 그럼에도불구하고 존버가 승리하지만, 존버하며 버티기도 쉽지 않다는 희한한 결론으로 가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딸이 쓴 에세이는 그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에게 무의식적으로 남아있고, 알게 모르게 쌓여갔던 감정과 생각들이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어려운 말 없이 정직하게 담겨있어서 좋았다. 명언처럼 특별히 어떤 사람의 말들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던 게 아니라, 인터뷰한 사람들의 표면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를 딸이 기억하고 표현했다는 게 느껴졌다. 결국 중요한 건 그게 내 안에 담기느냐의 문제일 거다.
좋은 글이란 뭔지 가끔 아이들 글을 보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딸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속하고 싶은 다섯 분의 선생님들과 자신의 마음을 “참 단순한데, 단단하다”고 표현했다. 그 짧은 문장을 처음 봤을 때, 참 정확해서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좋은 말들이 나열된 게 아니라, 나를 통과해가서 내 안에 쌓였던 어떤 순간들이 그 글 마지막 즈음에 담겨있었다.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생각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힘 빼고 툭툭 꺼내놓는 글이 정말 좋은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작년부터 딸이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 보면, 자연스러우면서 예리한 훅을 발견하게 된다 '이건 뭐지? 얘한테 이런 재능이 있었나?' 진심으로 10대 때 창의성이 경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워서 아이패드 들고 문자 치듯이 두드려서 글 한편을 완성하다니… 책상 앞이나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투덜대던 아이 머릿속에 이런 문장들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구나.
한 아이의 생각과 마음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때론 어떤 영화 스토리보다 놀랍고 신비하다. 천천히 한 소녀가 쓰고 있는 이야기를 오래 지켜보고 싶다.
단순하다. 그리고 단단하다. (딸의 길학교 장기인턴쉽 에세이 중)
무용하고, 운동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섯 번의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인턴십이 지나갔다. 하루하루가 데칼코마니 같던 나에게 인턴십은 무척 특별하고 두근거리는 날들을 선물해 준 것 같다. 아주 작은 나의 시야와 반경이 조금씩 넓어져 가는 기분이다. 사람들의 감정에 이입하다 보면, 내가 직접 경험을 쌓은 듯 마음속에 적립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들이 차곡차곡 쌓여 늘어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한국무용, 연극, 성악, 판소리’ 여러 예술 분야의 선생님들은 춤을 좋아해서, 무대를 좋아해서, 노래를 좋아해서 자신의 예술 분야에 애정을 가지고 계신다. 사랑과 미움이 아울러 섞여 있는 감정이다. 내겐 무용이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좋아하고, 잘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다. 참 단순한데 단단하다. 어쩌면 ‘잘 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결같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올해는 잘하는 것보다, 보여지는 것보다, 꾸준한 속도로 완주하는 데에 목표를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