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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un 29. 2021

지금 이 순간이 우리를 붙잡아

영화 '보이후드'가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

영화 '보이후드'를 그동안 세번 정도 본 것 같은데, 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잘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잘 보이지 않았던 마음들이 상상된다. 아마도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우연히 월리를 찾게되듯이, 계속 그 영화 속에서 다른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만 같다. 


12년동안 매년 2주씩 만나서 촬영 했다는 이 영화는 볼때마다 신기하다. 두 남매의 얼굴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해, 키가 크고, 말수가 적어지고, 패션이 변하고, 표정이 달라지는 시간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놀랍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부모들 얼굴에 하나씩 늘어나는 주름과 나이살의 흔적도 확연히 눈에 보인다.      

예전에 우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이 영화를 봤을 때와 지금 둘 다 청소년이 되어 다시 보니, 바로 내 옆에서 보이후드 걸후드의 과정이 진행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실제로 귀엽고 해맑게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보채던 아이가 어느새 뭘 물어보면 단답형 대답을 하는 사춘기 소년이 돼 있다.  


어떤 시간이 예고를 하고 찾아올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과정이 아무 마디나 접합면도 없이 순식간에 내게 당도해 있다. 보이후드의 시간처럼 삶은 아무 분절없이 늘 그렇게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쓱 흘러가 버리고 만다.

영화나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우리 삶은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 있는 삶이 아니라, 어쩌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우리 삶을 지나쳤던 모든 것들의 분절된 만남이자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마음에 남아서 뭔가를 만들어가기도 하고, 삶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조각에 지나지 않기도 한다. 


우린 그 삶 속을 지금 눈에 보이는 만큼, 발에 닫는 감촉만큼 느끼며 걷고 있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대사처럼 우리가 순간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이 우리를 여기에 붙잡아 두고 있는지 모른다. 

이 영화 속에서 항상 인물들은 어쩌다 그 순간에 당도해 있고,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으면 그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을 훌쩍 통과해 간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엄마와의 시간보다 주말과 휴일에 만났던 아빠와의 시간을 영화속에서 보던 우리는 인상깊게 기억한다. 

늘 더 좋은 미래와 성공을 바라보던 엄마의 삶 속에는 아이들과 나누던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화와 추억이 없다. 그래서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하는 엄마의 마지막 대사  '나는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말이 유독 서글프게 들린다. 


시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삶에서 도착과 출발은 공존하고, 인생은 시작과 끝이 없는 그저 길 자체일 것이다. 

그 길 끝 자락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실은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실감하며 흐느낀다. 

하지만 진작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게 아닐까. 

양육과 생계유지, 책임감에 발버둥 치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순간이 우리를 여기에 붙잡아 두고 있고, 지금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들 앞에 한없이 겸손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여름 밤 공기가, 내 마음을 스쳐지나간 좋은 추억들이, 딸 아이의 귀여운 농담들이, 아들의 소소한 영화 감상 수다가 그리워질 지금이 흘러가고 있다.


영화를 보며 더 생각나는 것들이 많았다. 다음에 또 길게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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