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SNS에 이런 글이 자주 뜬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여자는 딸이 되고,
나쁜 남자를 만나면 엄마가 된다.”
나는 후자 쪽이다.
2000년 무렵, 스물셋의 나이에 여섯 살 많은 김기사를 만났다.
그때 그는 내게 ‘든든한 아저씨’였다.
집이 풍비박산이 나 있던 시절, 하루가 전쟁 같았던 나에게
그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처음엔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했다.
아들이 고졸인데 내가 대학생이라,
“애 낳고 도망가면 어쩌냐”는 전형적인 옛날식 걱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고 나서는
“빨리 결혼시켜 도와주라”며
시어머니가 직접 나서서 결혼을 밀어붙이셨다.
결국 우리는 빚으로 시작된 결혼을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니,
그 든든한 아저씨는 ‘생활력 강한 남자’가 아니라
‘생활이 힘겨운 남자’였다.
입덧하던 날 밤, 남편은 포카판에서 새벽을 지새우고,
아기가 열로 뒤척이는 밤엔 PC방에서 게임을 했다.
양말은 아무 데나 벗어던지고,
밥상을 차려도 숟가락 하나 안 얹는 사람.
좋은 아버지의 모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였다.
결혼 7년 차쯤엔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혼 생각도 수십 번 했지만,
아버지를 빼앗길 아이가 떠올랐다.
그건 내 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했다.
책을 읽고, 걸으며, 성당에 다니며,
결국 아동가족학 박사 과정까지 갔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기사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게 됐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고,
도시 빈민층 청소노동자였던 어머니가
홀로 가정을 지탱하던 집안에서 자라난 소년.
그 불행하고 가난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그래도 책임을 다하며 가장으로 서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문득, 이런 마음이 든다.
그래도 잘 자랐다.
정말 애썼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렇게 이해의 문이 열리고 나니,
이 사람의 거친 말투와 서툰 행동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새 엄마가 되어 있었다.
양말은 빨래함에 넣고,
식사 후엔 설거지통에 담고,
도시락을 가져오면 씻어두고…
하나부터 열까지 25년째 가르치는 중이다.
우리 딸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아빠는 이제 조금씩 휴먼이 되어가고 있어.”
그 말을 들으면 피식 웃음이 난다.
김기사는 여전히 인간 수업 중이고,
나는 여전히 담임선생님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내가 16년째 유아교육과 아동가족학을 전공하며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있다.
그 많은 ‘금쪽이’들을 만나고 사랑하며 살아왔지만,
단언컨대 지금까지 만난 금쪽이 중
넘사벽은 단연 김기사다.
본업천재, 택배기사 김기사는 존경하지만,
인간 김기사는 아직 ‘수습 중’.
그래도 괜찮다.
내 팔자니, 내가 족히 25년째 교육 담당이니.
언젠가는 이 남자도 완성형 ‘휴먼’이 되겠지.
사실 내 박사학위는 시모친과 김기사가
공동수여해야 하는 거 아닙니꽈?
둘 다 내 인생의 실험대상이자
현장 교보재였으니까.
그날이 오면, 나는 그제야
딸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
지금도 김기사 운동화 사러 왔다.
오늘도, 인간 수업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