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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고 밥 지으며 편안함에 이르는 길

by EverydayRang 글밥집

今者吾喪我 (금자오상아)
“지금 나는 나를 잃었다.”

이 문장은 『장자(莊子)』 내편 「제물론(齊物論)」에 등장한다.
말한 이는 안성자유(顔成子游),
그의 말을 듣고 놀란 공자(孔子)에게 이렇게 덧붙인다.

“자네는 사람의 소리는 들었겠지만,
땅이 내는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야.
땅의 소리를 들었다 해도,
하늘의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네.”

여기서 ‘오상아(吾喪我)’는
단순히 자신을 잃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분별하고 계산하는 작은 나’를 내려놓고,
자연과 만물, 도(道) 그 자체와 하나 되는 경지를 말한다.

‘사람의 소리’는 인간의 언어와 이익의 세계,
‘땅의 소리’는 생명과 사물의 흐름,
‘하늘의 소리’는 그 모든 것을 품은 근원적 존재의 울림이다.

장자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나’라는 좁은 경계를 넘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오상아(吾喪我)란
자아의 소음을 내려놓고
만물의 조화를 듣는 귀를 여는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한결같이 고요해진다.


오상아(吾喪我).

이 말을 알고 나니, 지난 세월 내가 얼마나 ‘나’에 집착하며 살아왔는지 알겠다.


똑똑하고 잘난 나,

일 잘하고 능력 있는 나,

강하고 좌절하지 않는 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나.

온통 ‘나’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집에서는 김기사와,

학교와 직장에서는 학우와 동료들과

끝없는 인정 투쟁을 벌였던 것 같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바라던 나를 모두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김기사가 보이고,

김기사 덕분에 글을 쓰는 나를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마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도시락 싸고 밥 하는 택배기사의 아내인 나’를

그동안 부득불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이제, 인정 화해가 시작되는 오십을 맞는다.

버티느라 애쓴 나와도,

이기려 했던 세상과도

조용히 화해하려 한다.


아마 그게, 장자가 말한

‘나를 잃어 얻는 길’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장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옛날, 열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계함이라는 무당의 화려한 말과 행동에 홀려버렸다.

겉모습은 그럴듯했지만, 속은 비어 있는 가짜 도(道)였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스승 호자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라는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알맹이가 중요하다.

그 알맹이를 제대로 지녀야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열자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허황된 것에 끌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서 책상 앞에 앉아 학문에 몰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삼 년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그 단순하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열자는 차츰 세상일에 대한 좋고 싫음의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꾸며진 욕심과 차별심이 사라지고,

비로소 마음이 고요해지며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


그의 깨달음은 화려한 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일상 속 밥 짓기와 살아 있음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열자처럼 집 밖의 배움보다

집 안의 밥 짓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또한 알게 되었다.

배움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밥을 짓고,

그 무심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비로소 ‘나’를 내려놓는 공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그게 어쩌면

내가 맞이한 오십의 첫 번째 공부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멀리서 진리를 찾지 않고,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밥상에서,

오늘의 삶 속에서 나를 잃고

비로소 나를 배우는 시간.


이제 나는,

나를 버려 나를 얻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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