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 사진을 분류했다.
연사로 찍은 사진들 중 잘 나온 것들을 고르고,
어두운 건 조금 밝게 보정하고,
비스듬히 찍힌 건 수평에 맞게 돌리고,
쓸데없는 부분은 크롭해 보여주고 싶은 질감을 살렸다.
그렇게 정리한 사진을 모임 페이지에 올리자
곧 댓글이 달리고, 알림이 울리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사진 너무 좋다!”
“이 장면을 찍었구나.”
“나도 있네!”
“내가 이렇게 웃었어?”
“이거 너무 예쁘다.”
“고마워요!”
휴대폰을 들고 있던 두 손과 얼굴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얼어 있던 손발이 녹듯이,
몇 달 동안 굳어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았다.
내가 한 일을 기뻐해주는 사람들.
나도 쓸모 있는 존재일까.
한국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여겨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고마움의 주고받음’.
가까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기쁘게 하고,
쓸모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행복이었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줄 알았던 일상이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동안 내가 많이 아팠다는 걸 깨달았다.
존재가 희미해지던 호텔 같은 방,
외로움과 무능감 속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장인성, 「사는 이유」
도쿄에서 일하며 외로이 지내던 저자는
예전에 좋아하던 ‘사진 찍기’를 다시 시작한다.
등산 모임에서 사진을 찍어 나누며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오랜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쁨을 느낀다.
그 순간, 그는 깨닫는다.
쓸모 있다는 감각이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주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김기사의 저녁밥을 24년째 짓고 있고,
도시락 싸기는 그가 택배를 시작한 뒤로
거의 15년째 이어오고 있다.
퇴근 후 운동을 마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차리고 도시락 반찬을 만드는 일.
그건 너무 오래된 일상이라
이젠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해온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늘 눈팅만 하던 스레드에 글을 올렸다.
‘택배기사 남편 도시락, 매일 깔 맞춰 싸고 있어요.’
그리고 사진 세 장.
다음 날 아침, 좋아요 수천 개, 댓글 수백 개.
“대단한 정성이네요.”
“김기사님 행복하시겠다.”
“전생에 나라 구하셨나 봐요.”
“택배기사님들 덕분에 편히 삽니다.”
며칠 뒤 조회수는 18만을 넘었고,
댓글은 천 개 가까이 늘어났다.
그저 매일 하던 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이
이렇게 사람들의 지지와 위로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한 일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나는 직장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나름의 성과를 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일과 성취가 나를 다 설명해주진 않았다.
가정을 꾸리고, 남편을 서브하며,
살림을 이어가는 일 또한 내 삶의 중요한 축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일하는 걸 반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몇 번의 기회와 열정이 꺾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도시락을 싸고 밥을 짓는 이 일상이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처음으로,
밥 짓기가 나를 구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대단한 공적이나 성취가 아니어도,
누군가를 위해 매일 정성을 다하는 일.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밥 짓기가 글이 되고,
글이 나를 다시 쓸모 있게 해 주었다.
밥 짓기가 글이 되고,
글이 다시 나를 부드럽게 추슬러 주었다.
마치 속이 상한 날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이
천천히 마음을 덮어주듯이.
그래서 이제는 반찬 하나를 만들 때도,
국을 끓일 때도,
그 안에 ‘쓸모’과 ‘사랑’을 함께 담는다.
먹는 사람의 하루를 생각하고,
나의 하루를 달래는 마음까지 함께 넣는다.
밥 짓는 일은 누군가를 먹이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를 다시 살리는 일이다.
오늘도 그 밥 덕분에,
나는 여전히 쓸모 있게, 다정하게 살아 있다.
밥의 쓸모가 ‘먹혀서 사라지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을 하며 나의 쓸모를 다할까.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처럼
내 하루도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조용히 쓰이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