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기사를 만났을 때,
그는 영어유치원 노란 셔틀버스를 몰던 기사였다.
그는 가끔 혼자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고 했다.
어느 날, 떡볶이 냄새를 맡고 다가온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있었단다.
그 개가 어찌나 예쁘던지,
김기사는 그 녀석을 위해 일부러 돈을 더 내고
떡볶이를 몇 인분씩 사서 나눠주곤 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그때부터 이미
세상 모든 강아지들을 사랑하던 사람이었구나.
(물론 강아지들은 이렇게 염분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그때 김기사는 몰랐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떡볶이 후원자’였을 뿐이다.)
그때는 몰랐다.
길가에서 강아지를 귀여워하던 그 마음이
훗날 우리 집 거실을 따뜻하게 채울 줄은.
호두는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사춘기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던 시절
우연히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처음엔 김기사가 단호했다.
“내 사전에 개새끼를 집안에서 키운다는 건 없어.”
“어떻게 개새끼를 사람처럼 키우냐.”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퇴근하자마자 호두부터 품에 안는다.
호두가 꼬리를 흔들며 펄쩍 뛰어오르면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아이가 된다.
하루 종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다
들어온 김기사가 양말을 벗자마자,
호두는 고린내 풀풀 나는 양말을 낚아채
집안을 신나게 돌아다닌다.
그걸 보며 김기사는 깔깔깔 웃는다.
냉장고 문이라도 ‘찰칵’ 소리가 나면
호두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빠 옆에 찰싹 붙는다.
그 눈빛은 분명히 말한다.
“지금 뭐 꺼내셨죠? 혹시… 나눠드실 생각은?”
김기사는 또 좋아 죽는다.
요즘 들어 웃음소리가 늘었다.
호두 덕분에 말이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하루 종일 물건과 사람에 치이다 돌아온 중년의 김기사는
누구보다 잘 안다.
퇴근 후 문을 열면 뛰어와 안기는 존재,
말 한마디 못하지만 마음을 다해 반겨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신이 세상에 직접 내려올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고 하지.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존재가
강아지라고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꾸밈없이 사랑하는 눈빛.
“네가 세상에서 제일 귀해.”
그 한마디가 눈빛이 되어
김기사의 하루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호두는 우리 집 막내이자,
김기사의 온기다.
신의 마음으로 그를 위로하는,
작고 웃긴 6kg의 갈색 생명체는 따뜻한 기적 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