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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아래서 멈춰 선 김기사

도시에 남아 있는 작은 친절들에 대하여

by EverydayRang 글밥집

퇴근한 김기사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치매 어르신 얘기했었지?”
“응.”

남편이 이어서 말했다.

“아저씨라고 부르면 그렇게 좋아하셔. 다음엔 형이라고 부를까 봐.”

그 말을 듣는데 웃음이 터졌다.
나 같으면 내 모친 상대하기도 벅찬데 말이다.
우리 모친도 치매가 깊어져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다.
짧은 문장 하나, 표정 하나에도 감정이 뒤섞이고 체력이 소모된다.
그걸 아는 내가 남편의 이런 태도를 보면
‘저 까칠한 사람이 이런 부드러움도 있구나’ 싶어
조용히 마음이 반짝인다.

우리 가족이나 지인들은 김기사를 ‘도시 채집러’라고 부른다.
배달 중 어르신 집 앞에 감이 보이면
그걸 그냥 못 지나치고 따드린다.
오지랖이 배달 범위를 넘어선 지는 이미 오래다.

그가 일을 다니다 보면 늘 마주치는 어르신이 있다.
치매가 있으신데, 힘이 얼마나 세신지
주차된 차를 두고 시비가 붙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 집엔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요즘 감이 다 홍시가 되어 가길래
남편이 “감 좀 따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작년엔 “안 돼!” 하시던 분이 올해는 따라고 하셨단다.

남편이 열몇 개를 따서 드리니
어르신은 세 개만 달라하시고,
나머지는 동네 분들께 나눠주셨다.
반장이 직접 와서 “고맙다”라고 인사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줬다.

그러고는 남편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냥… 감이 아까워서.”

참 별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
어르신의 그 한마디와 남편의 작은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모친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은근하게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런 사람 냄새나는 풍경은
남편의 다른 거래처에서도 이어진다.

그 중 하나는 수제 디저트 전문점이다.
제과제빵 전공 딸과 명문대 화학과 출신 어머니가
손수 디저트를 만드는 곳인데 밸런타인·크리스마스 같은 시즌이면 가게는 거의 전쟁터가 된다.

남편이 물건을 픽업하러 가면
포장이 밀려 두 모녀가 허둥댈 때가 많단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투덜거리면서도
박스 접고, 포장하고, 스티커 붙이고, 라벨 정리하며
두 모녀 사이에 끼어 같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리고선 돌아오는 길에 꼭 한마디 덧붙인다.
“내 일도 바쁜데… 참.”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
두 모녀는 비싼 디저트를 한가득 챙겨주며 고마움을 전한다.

또 하나의 거래처는 카페다.
더워도, 추워도, 김기사가 문만 열고 들어서면 사장님이 늘 음료를 챙겨준다.

문제는 남편이 믹스커피 외에는 아메리카노의 맛을 모른다는 점이다.
아메리카노를 건네면 꼭 손사래 치며 거절한다.

주려는 사람과 받지 않으려는 사람의 귀여운 줄다리기.
결국 둘은 얼음물로 합의했다.

여름에는 김기사가 2리터쯤 되는 스테인리스 보냉병을 들고 가면 사장님이 얼음을 가득 채워준다.
둘의 이 작은 일상이 나는 괜히 웃기고, 또 고맙다.

이렇게 인정 많고 따뜻한 사람들을
하루에도 여러 번 마주하면서
까칠하고 말수 적은 남편에게도
조금씩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다.

도시라고 해서
모든 게 삭막한 건 아니라는 걸
김기사의 하루는 조용히 보여준다.

누군가의 일상 속엔
이런 사소한 친절들이 숨 쉬고 있고,
그 친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슬쩍 건네지고 있었다.

이 도시엔
아직 마음을 데워주는 온도가 남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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