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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벌어봐야 얼마나 번다고

평온을 사랑하는 여자와, 평온이 불편한 남자

by EverydayRang 글밥집

김기사는 가끔 꼭 한 번씩 이럴 때가 있다.
자취하는 딸내미가 전시 철거 때문에
저녁 8시 넘어서까지 한 끼도 못 먹었다고 했더니
갑자기 나에게 툭, 이러는 거다.

“애나 좀 잘 챙겨.”

집에도 못 들어오는 다 큰 애를 내가 어떻게 챙기냐고 했더니“아무튼 잘하라”고만한다.
아무튼. 무조건. 나보고.

그래서 말했다.
“생활비, 학비, 용돈까지 넉넉히 주는데 내가 더 뭘 하냐?”

그러자 김기사가 슬쩍 되받는다.
그 돈 네가 준 거냐고. 자기가 줬지 않냐고.
이번 달 월급 입금액을 보여주며 은근히 뻐기기까지 한다.

그 순간, 내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도시락도 네가 싸고 집안일도 네가 알아서 하고 나는 풀타임으로 일에만 전념할게.”

김기사가 빈정대며 묻는다.
“어린이집 교사가 얼마나 번다고?”

(이 대목에서 어린이집 교사들 분기탱천하는 소리)

그래서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내 연차면 300은 벌지.”

그러자 김기사가 픽, 하고 웃는다.

아… 어이가 없다.
진짜, 내일은 간장에 밥이면 그것도 감지덕지야!
(싸운 날 도시락 궁금해하는 스레드 스치니들까지 등장. 드디어 개봉 박두)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나니
화는 누그러지고 오히려 궁금증이 생겼다.

평소 김기사는 조용하고 담백한 사람이다.
큰 감정의 출렁임도 없고,
싸울 일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런데 꼭 며칠 평온하게 잘 지내고 나면
이렇게 뜬금없는 소란을 만들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심리학에 이런 설명이 있다.
사람은 ‘행복’보다 ‘익숙한 감정 상태’를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

김기사의 어린 시절은 늘 소란스럽고 불안했다.
술에 취해 화내는 아버지, 뒤집히는 밥상, 갑작스러운 고성들.
그 속에서 자란 사람이 ‘조용함’을 편안하게 느끼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서 화목한 집에서 자란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내 팔내꼰… 끙)

그래서인지 우리가 사이좋게 잘 지내는 시기가 조금 이어지면 김기사는 꼭 한 번씩 이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놓는다.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거 맞나?”

어제의 막말도 어쩌면 그런 무의식적 반응일지 모른다.
진짜 돈 얘기가 아니라,

“나, 이 집에서 의미 있는 사람 맞지?”
“나는 무력한 사람이 아니야.”
라는 자기 확인에 가까웠을지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들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럼 다 네가 해.”

그런데 아침이 되고,
스레드에 올린 김기사 막말 에피소드가 큰 반응을 얻고,
75세 스치니 할아버지가 남긴 댓글을 읽는 순간—

“김기사도 되어 보고, 따님도 되어 보았습니다.
행복한 글이에요.”

그 따뜻한 문장 하나에 어젯밤 토라졌던 마음이
한 겹씩 스르르 풀렸다.

세상엔 뭘 해도 다정한 사람이 있고,
가끔 소란을 내야 안정되는 사람도 있다.
그 두 부류가 한 집에 산다는 건
조금 번거롭지만 아주 인간적인 일이다.

이제는 안다.
김기사가 갑자기 투덜대기 시작하면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평온함이 낯설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여전히 평온한 집이 좋고,
그는 여전히 가끔 소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그 사이에서
서로의 속도를 조금씩 맞춰가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도 하루 종일 먼지가 잔뜩 묻은 조끼를 털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올 김기사를 위해
오늘 저녁 감자탕을 끓일 생각이다.
일주일 전부터 감자탕 타령만 하던 사람이니까.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이렇게 매번 다시 시작되는 일 같다.
토라졌다가, 풀렸다가. 오해했다가, 이해하게 되었다가.
한 그릇 뜨끈한 국물처럼 서로의 마음을 데워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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