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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부자의 정신승리

스펙은 없습니다만,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어요.

by EverydayRang 글밥집

요즘 화제라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야기.
어릴 때부터 모범생, 명문대, 대기업 입사, 25년 근속, 임원 눈앞.
서울 강동구 자가, 아들은 연세대.
말 그대로 ‘교과서 속 성공한 중년’. 자칭 ‘위대한’ 인생이다.

그런데 1화를 본 날 밤.
나는 어느 순간 잠을 설쳤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그렇게 현실이 훅 하고 밀려왔다.

김기사와 비슷한 나이, 오십 초중반.
하지만 스펙은 정반대다.
공고 졸업, 대기업 문 앞에도 못 가 본 삶.
내 집도 아직 없고,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낸 시간들.

그러나 우리에게는…

딱 하나,
우리 딸이 스스로 재능을 찾아 명문예고에 갔고
전공 분야에서 나름 명문대로 진학했다는 사실.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작업하며 살고 있다.


딸이 어릴 무렵, 친구 아빠들은
대기업·전문직·공기업이 기본 패키지였고
내 친구들 대부분은 학군지에서 자라
좋은 대학 → 좋은 직장 → 안정된 결혼
그 정석 루트를 밟아갔다.

만나면
집 평수는 늘어나 있고
차는 더 좋아져 있고
피드에 여행 사진은 끝없이 늘어만 갔다.

반면 우리는
2~3년에 한 번씩 전셋집을 옮겨 다녔고
해외여행은 딱 한 번.
시어머니 모시고 간 일본 여행. 처음이자 끝.

김기사가 일요일 배송까지 하게 되면서
3박 4일 휴가는 언감생심이 됐다.

나는 경차를 몰고,
김기사는 15년째 트럭을 모는 삶.
딸이 고등학교 등교했던 첫날 외제차 행렬을 보고는
“엄마 차가 더 유니크한데?”라고 웃던 그 말에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우리가 지켜낸 ‘기본’의 가치

하지만 나는 안다.
친정이 폭삭 무너져 길바닥에서도 살아본 내가
정말 감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것.
공과금을 밀리지 않고
아이 교육비 끊기지 않게 버텼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값지다.

친정 빚도 갚고,
친정 가족들 돌보는 일도 우리가 했다.
아버지 마지막 순간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돈 대신 ‘서사’를 쌓았다

딸을 부유하게 키우진 못했다.
대신 도서관 가까이 살며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웠고
학원 대신 산과 들과 바다를 걸으며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게 했다.

나 역시 도서관이
오래된 친구이자 숨 쉴 공간이었다.

낡고 해진 텐트 펴고, 찌그러진 코펠에 돗자리 들고,
기저귀 찬 아이를 데리고 캠핑 다니던 시절.
김기사는 밤도 따고 감도 따며
잠시나마 삶의 쉼표를 얻었다.

그리고 나는…
잠을 줄여가며 빚내서 공부하며 버티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부부는 서로의 삶을 조금씩 나눠 짊어지며
조용히 하루를 견뎌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서사부자'다

남들이 보기엔
조금 남루하고 초라한 중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초라한 건 아니다.

오히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서사가 많은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조금 초라할지언정,
이야기만큼은 누구보다 풍성한 서사부자다.

나는 안다.
우리는 성실했고,
정직했고,
땀 흘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또 하루를 버틴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 보면
부족해 보일지언정,
우리가 살아낸 날들은
누구의 삶보다 소중했고
누구의 자리보다 값졌다.

그게 바로,
남들이 모르는 우리만의 서사다.

그리고 나는 그 서사가
참 마음 든든하다.
라고… 정신승리처럼 말해보지만
어쩌면 진짜 진실인지도 모른다.

… 허튼소리 그만하고 얼른 출근하자.
아이들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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