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꾸 김기사에게 시를 ‘배달’하는가
25년 전, 연애하던 시절.
대학생 철부지였던 나는 김기사에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선물했다.
노란 셔틀버스 보조석에 늘 그 책이 놓여 있었지만,
김기사는 한 줄도 읽지 않았다.
그 책은 결혼할 때까지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고,
그의 무심함에 자연스럽게 ‘풍화’되어 갔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만화책 외에는 책이라곤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어린 왕자’를 읽을 리 있나.
그건 기적에 가까운 기대였다.
그래서 이후로는 김기사에게 책을 권하지 않았다.
포기 반, 체념 반,
종국에는 그냥 서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인정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나다.
나는 책이 없으면 숨이 막히는 사람이고,
좋은 문장을 만나면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나는 사람이고,
단어 하나에도 설레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김기사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세월이 갈수록 괜히 아쉽고… 살짝 서운한 마음조차 들었다.
‘이리 좋은 걸 왜 모르지?’ 같은 마음.
그래서 어느 날 결심했다.
안 읽으면?
배달하면 된다. 시(詩)를.
짧고, 쉬운, 스르륵 읽히는 시 한 편이라도
카카오톡에 조용히 붙여 넣어 보내보기로.
어쩌면 무심결에 읽을지도 모른다는
참 얄팍하고도 사랑스러운 희망을 품고.
그리고 나는 이걸
‘혁신적인 발상’이라며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중이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문득 눈부신 풍경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존재가 있다.
“이걸 누구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시(詩)는 그런 것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같고,
저녁 하늘의 노을빛 같고,
조용히 마음을 흔드는 작은 풍경 같다.
그래서 나는 그걸 남편에게 보낸다.
짧고 가벼운 한 편의 시라도
그 사람 하루의 빈틈 어딘가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카카오톡 창에 조용히 ‘배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배달하는 일은
아주 오래된 방식의 마음 쓰기다.
작은 문장 하나라도
누군가의 하루에 은근히 녹아들면
얼마나 보람되고 좋은가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걸 남편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보낸다면
그건 오배송이다.
그러니 나는 남편에게 보낸다.
읽든 말든,
잠금화면에서 미리 보기만 하고 넘기든 말든,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시는 결국 마음이니까.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니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반품도, 수취인 거절도 없었다고 한다. ㅎㅎㅎ)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 마음 한쪽에도
조용한 문장 하나가 내려앉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시를 배달한다.
오늘의 배달 시: 나태주 ‘행복’
오늘 아침,
김기사 카카오톡에 나태주 시인의 ‘행복’을 조용히 붙여 넣었다.
행복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 나태주, 행복, 『꽃을 보듯 너를 본다』
그리고 출근길에 문득 생각했다.
“아니… 김기사는 행복할까?”
돌아올 집이 있고,
떠올릴 사람이 있고,
외로울 때 흥얼거릴 무언가가 있으면
그걸 행복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 김기사는 과연 어디쯤에 서 있는 사람일까?
웃긴 건, 요즘 들어
김기사가 미울 때도, 고울 때도, 내 마음속 질문은 항상 같다.
“김기사는 행복한가?
그리고… 김기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상하고 은근한 변화: 글쓰기의 힘
김기사 덕분에
요즘 나는 글을 많이 쓴다.
김기사는 내게 생활형 뮤즈가 되어버렸다.
(뮤즈 본인은 모름. 알면 싫어할 확률 200%.)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를 ‘시인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요리보고 조리 보고 뜯어보고,
평가도, 판단도 내려놓고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평가 없이 관찰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결혼생활 24년 만에
글쓰기가 이렇게 사람을 바꾸고,
관계의 결을 슬쩍 뒤집고,
심지어 남편을 ‘관찰 대상자’로 만들어버릴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무튼 결론은 단순하다.
글쓰기 만세다.
김기사 만세(…는 조금 고민).
김기사는 물건을 배송하고,
나는 김기사에게 시를 배송한다.
그리고, 내일의 배달 시
좋다
나태주
좋다
좋아요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
언젠가 그 사람 마음 한 귀퉁이에도
사부작사부작, 문장이 스며들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