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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녹음기 좀 켤게요”

3개월 뒤 떠나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남긴 67년의 육성 기록

by EverydayRang 글밥집

“작가님, 아버님과 나눈 그 대화들… 하나씩 하나씩 풀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67년 아버지의 생애에서 배운 메멘토 모리' 얼마 전, 제 글을 읽어주신 Sylvan whisper 작가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입니다.

메멘토 모리.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결국 하나라는 지난 글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지요.

그 공감에 힘입어, 오늘 저는 아주 사적인, 그러나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를 ‘1005호 병실의 기록’을 꺼내 보려 합니다.




2019년 10월 15일 오전 8시 30분.

폐암 말기 투병 중이신 아버지의 병실.

나는 딸이 아니라 ‘연구자’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는 건 질적 연구라는 건데요. 아버지가 겪으셨던 경험을 듣고 싶어요. 힘드시면 60분만 해도 괜찮아요.”

어색한 말로 서론을 꺼내며 녹음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것은 연구를 가장한, 아버지의 생애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고 싶은 딸의 절박한 시도였지요.


1. 설거지하던 ‘막둥이’와 어머니의 20만 원


“아버지,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 주세요.”

첫 질문에 아버지는 미리 적어 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여셨습니다.


"내 아버지는(너의 할아버지) 청주 김 씨 장손이었고 동네 유지였지.
근데 술을 그렇게 좋아하셨어.
작천동 술 먹는 삼인방 중에 한 명이셨다고.
게다가 할머니가 두 분이셔서,
나는 4남 1녀 중 막둥이였어.
형제들 틈에서 늘 외로웠지."

그 외로움 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고단함을 가장 먼저 알아챈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내가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서 설거지를 했어.
시골 부엌이라 재래식인데, 어머니 밭일하고 오시면 물 떠 드리고, 쌓인 설거지 다 해놓고… 동네 사람들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일 잘 도와준다’고 칭찬이 자자했지.”

칠십 노인의 얼굴을 한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멈추지 못하셨습니다. 조숙했던 막둥이의 효심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어머니 임종하던 날,
형님들은 연락도 안 되고 나 혼자 지켰는데…
어머니가 병원 침대 밑에서 꼬깃꼬깃 모아둔 용돈 20만 원을 꺼내 주시더라.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막둥이 네가 마음에 걸린다’고…”

그 20만 원은 아버지의 평생을 관통하는 가장 무겁고도 따뜻한 돈이었을 것입니다.



2. 논두렁으로 날아온 전보 – “축 합격”

아버지는 당신 인생의 황금기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고생만 하던 막둥이의 인생이 활짝 핀 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셋째 형님이 선린상고로 나를 편입시켜 줬어.
그리고 졸업 6개월 전, 농협에 응시했지. 수석으로 합격했어.
8월인가 7월인가…
시골 논에서 아버지랑 일하고 있는데,
멀리서 우체부가 전보 들고 뛰어오는 게 보이더라.
전보에는 ‘축 합격, 농협!’이라고 적혀 있었지.”

아버지가 논바닥에서 뛰어나가 전보를 받아 든 순간.


“아버지가 일하다 말고 동네방네 소리치셨어.
‘동네 여러분, 우리 막둥이가 농협 들어갔어요!’ 하고.
바로 돼지 한 마리 잡고 잔치를 했지.
그때 셋째 형이 무교동 양복점에 데려가서 취직 기념으로 양복도 맞춰주고…”

아버지는 그때를 회상하며 다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첫 사회생활의 성공, 그리고 가족에게 인정받았다는 그 감격이 60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3. 이틀 밤을 새워 지은 이름, ‘랑(郞)’


"너 태어났을 때가 제일 좋았어."

아버지는 제 이름 이야기에서 가장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재직 중이라 부족할 것 없던 시절.

오토바이에 저를 태우고 강원도로, 테니스장으로 다녔던 추억을 꺼내셨습니다.


“네 이름 지으려고 이틀 밤을 새워 옥편을 뒤졌어.
어떻게 지을까 고민 고민했지.
덩치도 크고 씩씩하게 살라고
‘사내랑(郞)’이 눈에 딱 들어오더라.”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내 이름이 아버지의 가장 평온했고, 가장 부유했던 시절에, 이틀 밤을 고민해 지어진 이름이라는 것을.

(그래도 딸한테 사내 랑은 쫌....아버지 바람대로 덩치 크고 씩씩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ㅎㅎㅎㅎㅎ)



4. 두 딸이 함께 왔던 퇴원 날의 염원


아버지는 가장 보람됐던 순간으로 며칠 전 일을 꼽으셨습니다.


“지난여름에 퇴원할 때…
너도 혜진이(둘째 가명)도
서로 개성이 강한데,
그런 가운데서도 퇴원하던 날
두 자매가 나란히 병원에 왔잖아.
택시를 타고 집까지 태워다 주던 날…
그때가 가장 좋았어.”

피는 진하다고 했던가요. 아버지는 두 딸이 함께 있는 모습에서 당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날 처음 알았어.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지금도 바람이 있다면, 아무 욕심도 없고…
너희들 다정하게 사는 모습 보는 거야.
지금은 저것들이 성깔 있고 자존심도 세서 그렇게 지내지만 다시 화합하겠지.
그렇게 기도하며 살고 있다.”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당신의 마지막 유산이 자식들의 화목이기를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5. 지하실의 뺨 한 대, 그리고 공원 벤치의 아들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가장 깊은 후회가 이어졌습니다. 사업 실패 후, 살던 서울 아파트가 잘못되어 경기도 xx동 지하실에서 살던 시절의 일입니다.


“그때 아파트 잘 못돼서…
혜진이가 막 대들어서
뺨을 한 대 때린 적이 있어.
그게 평생 가슴에 박혀 있어.
지나고 보니까 다 부질없는 짓이었는데…
내가 조금만 참고,
조금만 배려했으면 됐을 것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은 막내아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인영이(셋째 아들 가명)도 여러 가지로 챙겨주지 못했어.
그때 이 녀석이 막일(막노동) 일을 다녔나 봐.
나도 일하고 왔는데
둘이서 삼겹살 구워 먹는데
인영이가 그러더라.
‘아빠, 저 오늘 노가다 갔다 왔어요.’
그때는 말다툼도 하고…

그러더니 어느 날 컴퓨터만 들고나가버렸어.

나중에 내가 네 시쯤 퇴근하고 들어오는데,
공원 벤치에 인영이가 누워서 쉬고 있더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힘들어서 그랬던가,
집에 가도 별 볼일이 없어서 그랬던가…
지금도 인영이만 생각하면 내가 한이 맺혔어.
죽는 날까지 해 줄 걸 다 해주고 가야 하는데…”

아버지는 통증보다 자식에게 못 해준 일로 더 아파하고 계셨습니다.



6. 1005호 병실에서 배운 관계의 진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아버지는, 병실에서 냉정한 인간관계의 본질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엊그제 피를 토해서
침대 시트를 갈아달라 했더니
간호사가 여기까지 갖다 주기는 하더라고.
근데 깔아주는 건 자기 영역이 아니래.
그때 절실히 느꼈지.
자기 영역 외에는
절대 침범해서도 부탁해서도 안 되는구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거야.”


고독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시던 아버지는, 결국 그 고독의 끝에서 다시 가족을 붙잡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걸 배웠다.
하지만 그래도 너희들이 와 주잖아.
모두 열심히 기도해주고 있으니까
내가 절망을 안 해.
내가 맺힌 게 많아서 이렇게 그냥은 못 간다.

이 보잘것없는 내 인생 스토리가…
네 박사 과정 연구 자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며 녹음기를 끄자, 아버지는 다시 힘없는 환자의 얼굴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내 녹음기 속에는 설거지하던 막둥이, 전보를 들고뛰던 청년, 첫째로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지어주던 아버지, 그리고 병상에서 삶을 정리하던 한 인간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부모에게도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한 사람의 고유한 역사가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효도는 이 한마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이 글은 2019년, 폐암 투병 중이던 아버지와 실제로 진행한 생애사 구술 면담 녹취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인터뷰를 마치고 3개월 뒤, 영원한 안식에 드셨습니다.


다음 회 예고

【연재 2】 “나는 늘 좋은 아버지인 줄만 알았습니다” –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과 막내를 향한 마지막 절규

→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딸에게 느끼는 미안함, 홀로 미국으로 떠난 둘째 딸 그리고 결혼,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가출한 막내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절규까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한 남자의 가장 깊은 고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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