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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Nov 12. 2017

화가의 "마더"

- 제임스 휘슬러, <어머니의 초상>

흔히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천재 화가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떠올린다. 그런데 당시 예술계에서 숱한 논란을 일으키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또 한 명의 비운의 화가를 꼽는다면, 근대 미술사조의 모든 것을 직접 실험했던 제임스 아봇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예술지상주의, 라파엘-전파, 쿠르베의 사실주의, 모네의 인상주의 등을 접하고 곧 폐기하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찾으려 했던 화가였다.  



제임스 휘슬러는 183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웰에서 철도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한창 철도 공사가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탓에 어린 제임스는 당시 아이들과는 달리 여러 번 이사를 해야 했다. 그가 3살 되던 무렵 새로 이주했던 코네티컷 지역에서 안타깝게도 무려 3명의 어린 동생들이 연이어 사망하게 된다. 아무리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당시였지만, 추측하기에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그의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그의 아버지는 여러 지역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다녀야 했고, 제임스는 매우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제임스가 8살이 되던 해, 러시아로 이주한 이후 점차 그림에 탁월한 재주를 보이기 시작했고 11살이 되던 해, 러시아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합격한다. 요즘 말로 “영재 아동”임에 분명하다. 어린 제임스를 지켜보던 당시 유명 화가 윌리엄 알란 경(Sir William Allan)은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의 아들은 놀라운 천재성이 있어요.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자꾸 억누르려 하지 마세요.” 당시 제임스와 어머니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윌리엄 알란 경과의 만남을 일기장에 남겨놓았던 어머니는, 그러나 곧 이 충고를 잊고 만다. 그녀는 다시 엄한 포스의 억압적인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그 이듬해, 남편이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당시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삶이란 어려운 것이었다. 어린 자녀들의 연이은 사망, 남편의 이른 죽음, 슬픈 마음을 의지할 곳 없었던 제임스의 어머니는 영재아였던 제임스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제임스와 어머니의 관계는 평생 갈등과 반목의 연속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사고의 지평이 일반 아이들과 달랐던 제임스에게 어머니는 화가가 아닌 목사가 되길 강요했다. 자신의 고단한 삶을 지탱해준 것이 신앙이라고 여겼을 그녀로서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는 결국 사관학교로 몰래 진학하여 어머니의 강요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허약한 데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제임스는 딱딱한 군대식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일부러 황당한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여 스스로 퇴학 처분을 받아낸 후 프랑스로 떠났다. 그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미국 땅을 밟지 않았다.


제임스는 술과 여자에 빠지는 어수선한 파리와 런던 생활을 이어 가는 중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음악과 미술의 어떤 공통성에 착안, 작품의 부제로 ‘심포니’ ‘녹턴’ 등을 사용하거나, 당시로서는 금기에 가까운 흰색 안료를 말 그대로 ‘쳐 바른’ 여성 초상화를 그리는 등 파격적인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 /  Nocturne in black and gold


그러나 그의 동시대 비평가들은 도무지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고, 심지어 당대 유명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휘슬러의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추락하는 불꽃>을 보고 미완성인 작품을 전시했다며 "대중의 얼굴에 물감통을 내던졌다"라고 비난했다. 1878년,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러스킨을 고소했고 제임스는 판사 앞에서 스스로를 변론하며 다음과 같이 대화를 남겼다.


판사: 작품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렸는가?
제임스: 이틀 걸렸습니다.
판사: 겨우 이틀 동안의 노동에 2,000 기니를 요구했던 것인가?
제임스: 아니, 나는 평생의 작업으로 얻은 내 지식에 대한 대가로 그 값을 요구한 것입니다!


결국 휘슬러가 승소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뜻밖의 작품을 통해 제임스가 주목받게 되었다. 어머니의 초상화, <회색과 검은색의 편곡 No. 1 (Arrangement in Greyand Black No.1) (1871)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사실 제임스는 처음부터 어머니를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고, 오기로 했던 모델이 취소하자 즉흥적으로 어머니를 그렸던 것입니다. 관절염이 있는 어머니가 결국 서 있는 자세로 포즈를 취할 수 없자, 특이하게 앉은 채 측면을 그려놓은 것인데, 이 작품이 전시된 후, 작가가 부여한 작품 제목이었던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No.1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1)>과 상관없이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회자되었다. 세월을 견뎌낸 검소하고 신실해 보이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1


그가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에 그렸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의 개인사로 미루어 보아 그는 어머니 생전에 살가운 아들은 결코 아니었기에, 자애로운 어머니 모습과는 전혀 다른 딱딱하고 경직된 노인의 자태에 심지어 온통 검은색으로 ‘쳐 바른’ 초상화에 대한 호평은 화가 자신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삶은 아이러니하다. 정작 평생 벗어나고 싶었던 어머니의 기대, 압박, 그늘 때문에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아들이었던 제임스는 모든 작품들 중에서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대표작을 남기게 되었으니, 그의 어머니가 역설적으로 아들의 삶에 큰 기둥이 되어 준 셈이다.


어머니의 삶이 덜 고단했다면, 아들의 부족한 사회성 그러나 뛰어난 천재성을 배려해주는 여유가 그녀에게 있었다면, 오늘의 제임스 휘슬러의 이름은 어떤 기록으로 남게 되었을까?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존재가 곧 제임스 휘슬러의 존재로 남겨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제임스 휘슬러 한 개인에게 행운인지 비극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티스트는 때로는 자기 땅을 떠날 필요가 있다. 

문을 열고 떠나라. 다시 그 문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THE DOORS - ALBINONI ADAGIO.

https://youtu.be/Bms33Rjj6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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