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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높빛 Nov 23. 2022

2. 21살의 학부연구생

나의 도시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

이 글은 [1. 학부시절을 되돌아보며(저학년)]에서 이어집니다.


논문과의 첫 만남

 

   2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국가근로를 하게 되었다. 사실 공부하면서 용돈벌이를 하기 위해 지원한 국가장학금 제도였는데 덜컥 합격이 되어 하게 되었다. 내가 지원한 부서는 '학과근로'로 나를 배정 받으시는 교수님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는 근로였다. 누군가는 교수님의 커피 타기와 오피스를 청소하는 근로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논문을 줄줄 번역하거나 데이터 수집, 또는 잡다한 분석 및 실험보조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후자는 소위 학부생 랩 인턴(Undergraduate internship)또는 학부연구생(Undergraduate research assistant)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그 당시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하셨던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교수님은 도시계획/설계 분야의 교수님이셨는데 지금도 내가 본받아야 하는 은사님 중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 인생관이 멋있다고 표현하고 싶은 분이고, 지금도 종종 시간이 되면 연락드리며 찾아뵙고 있다.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세밀한 관심과 학과에 대한 애정은 당신을 "교수님"보다 "선생님"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을 크게 만들었다. 사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학부과정일 때 2학년 연구 인턴쉽은 하기 어려웠다. 인턴 T/O는 한정이 되어있는데 전공지식이 없어 교수님과 대학원생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처음 교수님께서 내주신 과제는 논문 리뷰였다. 나의 리뷰를 기준으로 교수님께서는 국내의 어떠한 큰 사업과 관련하여 그 연구 유형을 분류하시고, 다시 교수님께서 정독하시어서 논문의 유형과 의의를 분석하는 리뷰 논문을 작성하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나의 역할은 해외 논문 50편, 국내논문 45편에 대해 어떠한 논문인지 간략히 작성하고, 유형 분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처음 내가 해외 논문을 볼 때 놀란 것이 몇 번 있었다. 우선 무지막지한 영어 지문에 크게 놀랐다. 내가 제일 길게 읽은 영어질문은 수능 영어 지문이 다인데 모르는 영단어와 해석이 되지 않은 문장들이 많아 옆에 구글번역기를 항상 끼고 있었다. 한 번은 해외 논문 중에 익숙한 성함이 있어서 교수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주신 논문 중에 이 사업에 대한 교통영향을 분석한 논문, 혹시 우리 학과 교수님이신건가요?"


    "오 맞아. 이건 그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이야."


  무언가 연고 없는 해외에서 한국인을 보는 기분, 아니면 외국인이 반갑게 한국말로 인사하는 기분 같은 반가운 기분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다들 해외 논문을 쓰는구나. 신기하다. 의 느낌을 가지며 교수님이 내려준 과업을 하나 둘 진행했다. 이러한 기회 덕분에 논문의 구조와 논문 읽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논문의 초록에는 무슨 말이 들어가고, 서론/선행연구 고찰/방법론+분석 과정 또는 실험 설계/결과/결론은 어떠한 구조로 논리를 가져가는지, 그리고 전공별로 선호하는 논문 구조는 어떠한지 이러한 요소들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물론 논문이라는 것을 이전에도 RISS를 통해서 과제하다 몇 번 본 적은 존재하지만 '각을 잡고' 본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긴 글의 영문과 국문은 읽어본 적이 없어 끙끙댈 때 교수님께서 논문 읽는 법을 알려주셨다.


논문을 읽을 때는 본문을 다 읽으려 하지말고, 초록을 읽어서 어떠한 논문인지 봐야 해. 그리고 서론과 결론을 보며 논문이 어떠한 흐름을 취하는 지 확인한 후에 이 논문의 방법론을 읽어서 논문의 메인 요소를 알아야 쉽게 읽혀.


    내게 논문을 통째로 읽는 것은 피자 라지  판을 칼로 자르지 않고  번에 먹는 것과 같았다. 허겁지겁 먹어서 먹은 것 같지도 않고, 먹는데도 불편한 것처럼 논문을 허겁지겁 이해해서 내용도 남지 않고, 읽는데도 많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논문을 음미해야 맛과 느낌이 오래가는 법. 그것이 내가 연구와 처음 접하게 된 순간이었다. 논문에 대해서는 뒷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교수? 원한다면 알려주지


   교수님께는 무언가 말을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 꿈은 예전부터 교수였는데, 교수가 되려면 어떤 길을 가는 지는 알고 있으나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두렵다는 나의 질문에 인생의 선생님이자, 같은 전공을 수학한 선배로서 교수님께서는 꽤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선, 교수가 되는 과정에서 여유를 부리는데는 어려움이 있지만 박사 학위 과정에서 부족함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TA든, 장학금이나 과업을 통한 펀딩이든 어떻게든 입에 풀칠할 먹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석사과정은 다만 부모님께 조금 손을 벌릴 수도 있으나 박사과정 때는 부모님을 지원해드리기 어렵지만 부모님 손을 벌리지 않고 학위과정을 할 수 있으니 경제적인 요소가 내 발목을 잡는다면 충분히 고민해보고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 교수를 하려면 고려되는 것이 '네트워크'와 '실력'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상적으로는' 국내 현직 교수진 및 관련업계 종사자와의 네트워크를 쌓으려면 국내 명문 대학원에 입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해야 하며, 해외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세계적인 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는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고 하셨다. 물론 단순 해외 박사 학위만으로는 교수를 주는 시대는 이제 아니기 때문에 연구 실적이 추가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야 하고, 기존의 그러한 구조가 당연하게도 국내외 박사 학위자들의 교수 부임으로 조금은 사라지고 있다고 덧붙이셨다. 물론 이는 이상적인 교수 임용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고,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는 대체 불가한 인력이기 때문에 정년까지 유지되는 종신직에 가까우며, 이러한 상황에서 교수 임용을 바라면 선배 교수가 먼저 정년퇴임을 하여 T/O가 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수님께서는 한 가지 덧붙이신 것이 베이비 붐 세대 (1955~1974)의 정년이었다. 내가 학위를 마치고 교수를 비롯한 인력시장에 뛰어들게 될 때 즈음에 나의 수 많은 선배들이 연구 및 기술의 전선에서 하나 둘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심과 동시에 한국의 인구 감소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위기감도 함께 불어 넣어주셨다.


  교수님께서는 고작 21살, 2학년 밖에 되지 않은 학부생의 이야기에 조금은 동심(?)을 지켜주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선 나의 생애주기를 생각해서 미래의 먹거리(=나의 직장)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고, 단순히 내가 가고자 하는 직업의 인력구조 뿐 아니라 산업구조도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니 지속가능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수님과의 상담이 내 대학원 진학의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지만 전공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며, 나와 내 전공의 생애주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했던 것 같다. 물론 오늘날의 대학원이 이러한 생애주기와 산업구조에 정답은 아닐 수도 있으나 정답을 찾아가는 연산과정이 아닐까 싶다. 


첫 학부연구생의 삶과 마무리


   리뷰 작업 이후에는 방학 때 석/박사과정생의 연구를 보조하는 역할로 투입되었다. 한 석사과정 선배의 졸업논문과 관련하여 노원구 주택가에서 일요일날 같은 학과 선배와 함께 설문조사를 돌렸다. 지금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설문조사로 위장한 사이비 단체 가입 종용에 대해 거부감이 많은 시절이었기에 학교 마크가 들어간 이름표를 꼭 손에 쥐고, 내 관등성명과 설문 목적을 5초 이내로 이야기하는 재주가 생겼었다.


   이후에는 해외 박사과정을 희망하는 석사 선배의 논문 연구와 관련하여 빗물 투수블록을 설치한 강북구의 한 마을의 열섬효과 저감을 분석하고자 지면온도계를 들고 시간대별로 한 번씩 환경지표들을 책정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실험은 비교군과 대조군이 필요하기 때문에 투수블록에서 한 번, 아닌 곳에서도 한 번, 그리고 다양한 시간대와 날짜에서 수행되었다. 또한, 일정한 간격에서 책정하기 위해 종이컵을 들고, 일정 간격마다 종이컵을 두었다. 종이컵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연약한 물체가 아닐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다녔고, 나는 그 날아다니는 종이컵을 다시 제자리에 되돌려두곤 하였다.


   다시 되돌아보면 재밌었던 에피소드였는데 연구자가 발로 뛰며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에 아쉬움을 많이 느꼈는지 교수님과의 면담시간 때 도시계획, 설계의 석박사 과정은 몸소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냐는 살짝 불만섞인(?) 질문을 꺼낸 적이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며, "해외에서도 데이터 수집은 설문조사로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도시계획 및 설계 분야는 아직까지 그렇다. 나도 젊었을 적에 학교 인근에서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며 답변해주셨다. 물론 최근에는 공공데이터의 등장으로 단순한 전통적인 설문조사 기반의 도시계획, 설계 논문보다는 데이터와 기술을 응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점점 옛날 이야기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수님과 마지막으로 했던 과업은 교수님의 연구와 관련된 과업이었는데 맛집과 주차장과의 상관성과 관련하여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관련 도면자료를 수집하고, 실제 변화된 케이스들을 찾아가는 일을 했는데 의도도 재미있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성취감도 생겼어서 마지막은 재미있게 하였던 것 같다.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신 다른 교수님께 연락을 취해보기도 했으며, 도면과 관련하여 공공기관과 연락하며 도면 정보를 수집하면서 연구자의 삶을 살짝 맛을 보기도 하였다. 


   학생회와 학과 밴드부 회장, 그리고 무리하게 21학점을 들었던 내게 친절하신 교수님은 편의를 많이 주셨기에 연구를 하는 것이 편했을 수도 있으나, 2학년 학부연구생의 기억은 대체로 편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연구와 친해지지? 를 교수님께서 알고 계셨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연구와 친해진 계기를 꼽자면 이때가 아닌가 싶다. 나의 첫 학부연구생 엔딩은 군 입대로 인한 학부연구생 마무리였다. 종종 식사자리도 석/박사 또는 객원연구원 분들과 마련해주시고, 입대 전에는 불맛으로 유명한 중식당과 카페에서 식사와 카페 한 번을 사주셨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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