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쉼
12월이 오기 전에 나만의 순례길을 떠난다. 10년만 젊었어도 배낭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도 떠나는데 아이 셋을 키우는 40대 가장에게 그런 나 홀로 여행은 남의 이야기고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꿈 같은 길이다. 그냥 [걸어서 세계 속으로]이나 [나는 자연인이다] 교양 채널을 보면서 대리만족한다. 그보다 영어가 안 돼서 또 한 번 접겠지.
집 떠나와 하룻밤 잘 수 있는 나만의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하다. 멀리 가봤자 서울.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고 벼락치기로 영어 공부할 필요도 없다. 대신 매년 자체평가서를 제출하고 나면 일하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한계들을 살피기 위해 연수 또는 교육을 찾아다닌다. 겸사겸사 출장지 근처에 맛집이나 이색 카페, 독립 서점은 꼭 들른다. 도장 깨기 하듯 네이버 지도에 나만의 리스트가 늘 때마다 짜릿하다. 합법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생각해 보면 쉼에도 목적이 있다. 교육복지사는 교육청에 속해 있어 사회복지사 보수교육 법정 의무교육 대상자가 아니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굳이 교육에 참여한다. 보고서를 쓰고 다음 해 계획을 세우기 전에 꼭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쉼을 통해 한 해를 돌아보며 깨달음을 얻는다. 강의를 듣다 보면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쉼이라고 해서 하는 일을 멈추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교육복지사는 배우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금세 소진되고 번아웃 된다. 그동안 감정 또는 강점 카드 같은 상담이나 솔리언 또래상담사 양성 교육 같은 프로그램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배웠다. ADHD, 자해, 우울, 무기력 같은 아이들이 호소하는 어려움과 빈곤, 아동 학대, 중독 같은 사회 문제를 다룬 주제를 듣는다. 매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빠르게 바뀌는 이슈들을 학교 현장에서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올해는 [복지에 트렌드를 입히다] 주제가 끌렸다.
강의는 한마디로 김난도 저자 [트렌드 코리아 2026] 책에서 다루는 10가지 트렌드를 근거로 어떻게 하면 실천 현장에서 접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강의였다. 생각해 보면 지난 학교에서 [부모-자녀가 함께하는 66일 좋은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도 트렌드 책과 [초등 매일 습관의 힘] 책을 참고하고 기획했었다.
쉼의 5가지 요소
1. 쉼 이후에도 긍정적인 감정이 이어지는가?
2. 쉼 가운데도 성찰과 깨달음이 있는가.
3. 그냥 편안하게 쉴 수 있는가?
4. 쉼을 가지고 에너지를 얻는가?
5. 쉼을 가지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가?
나만의 재충전 방법은 박연희 작가의 [드디어, 쉼표]에서 말하는 쉼의 다섯 가지 요소를 충족한다. 적게는 네 시간. 서울까지 올라갈 때는 1박 2일짜리 교육을 듣고 힐링한다. 누가 보면 피곤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자유롭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어 신경 쓰지 않아 좋다. 오히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이 주는 해방감이 있다. 의도된 고독감 속에 편안함과 만족감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이대로 괜찮은가?"
"성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올해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인가?"
지난 일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일을 내다본다. 강의를 들으며 문뜩 떠오르는 생각을 적다 보면 묵혀두었던 감정과 생각들이 서서히 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시 한 해를 버틸 에너지와 방향을 조금씩 되찾는다. 교육복지사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중에 지키고 싶은 철학은 무엇인가? 어떤 교육복지사가 되고 싶은가? 해답을 찾는 나에게는 꼭 필요한 순례다.
이런 날은 나를 위한 한 끼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날은 점심시간에 한 해 수고한 나를 위해 맛집을 검색했다. 가고 싶었던 돈카츠집은 교육 장소에서 걸어가기엔 애매한 거리라 아쉽게도 다음으로 미루고 스파게티를 먹을까 라멘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리뷰를 보다가 세 모금 맥주(300cc) 사진을 보고 호시마츠 생라멘 집으로 갔다. 낮술이 마약보다 도파민이 터진다던데 몇 년만에 낮술인지 충만한 점심이었다. 하루 동안 오롯이 나만을 위한 완벽한 쉼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