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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자/생산자 관점 vs. 수요자/소비자 관점

개념과 통찰-12

by 김덕현

'공급자/생산자 관점'과 '수요자/소비자 관점'의 차이

1980년대 말쯤까지 기업 경영자는 통상 생산자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곤 했다. 기업이 제품을 만들면 수요자/소비자들은 군말(?) 없이 그것을 구매, 사용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영 의사결정을 포함한 기업활동의 많은 부분이 소비자 관점으로 이동하였다. 정보통신(ICT) 기술과 수송 수단이 발달하면서 소비자의 욕구/기대가 커지고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시장 권력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이동한 것이다. 기업의 생산방식은 종래의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나아가 특정 소비자 그룹의 요구에 부응하는 맞춤생산(customization)으로 진화했다. AI를 포함한 디지털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특정 개인의 생활방식, 구매 패턴 등을 반영한 개인화생산(personalization)도 등장하고 있다. 소비자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원하는지를 조금이라도 먼저 파악해서 대응하는 것이 단기적 매출/이익에 영향을 끼치고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존폐를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선도기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소비자가 제시하는 아이디어나 소비자의 역량을 제품 기획이나 설계, 제조, 마케팅/판매 등에 활용해서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생산자 관점과 소비자 관점을 연결, 통합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자/공급자 관점에서 비롯되는 문제점

기업이 생산자 관점으로 편향된 사고 및 행동 방식을 갖게 되면 성장이 더디거나 심각한 경우 도산에 이르기도 한다. 소비자의 기대/욕구와 관계없이 ‘최고의 기술’, ‘최고의 제품’만을 주장하는 기업 또는 제품 수명주기의 앞부분 즉, R&D, 제품개발, 생산/제조에 치중하고 뒷부분 즉, 완제품의 유통과 사후지원, 폐기 등은 무시하거나 소홀하게 다루는 기업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시장/소비자의 반응이나 기대에 둔감해져서 신제품 개발 기회를 놓치거나 매출/이익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진다. 기업이 보유한 기술은 탁월한 제품/서비스로 구현되고 시장에서 이익을 창출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을 수 있다. 우수한 기술과 제품은 기업이 생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며, 지속 성장하는 기업이 되려면 우수한 마케팅/판매/고객지원 같은 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대학은 오랫동안 지식 탐구 중심의 학과/전공, 교과목, 교육방법 등을 유지해 왔다. 2000년대 이후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융합 지식/기술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종래의 공급자 관점이 아닌 수요자 관점에서) 학제적 연구와 융합학과 및 융합교육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학문/학과 간 경계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실습/프로젝트 기반 학습보다는 일방적 강의 위주의 교육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대학은 매우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한편으로는 출생률 감소에 따른 신입생 숫자 감소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는 가운데 교육 시스템 전반에 대한 디지털 혁신 투자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진 학생들을 새로운 지식, 기량(skill), 태도를 갖춘 미래 인재로 양성해 달라는 사회적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상아탑’의 지위나 역할을 견지하면서 다양한 수요자 요구에 부응하는 공급 역량을 갖추는 것이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정부/공공기관은 대부분 여전히 공급자 관점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정부 서비스는 궁극적으로 수요자인 일반국민이나 기업을 위한 것인데 각종 성과지표는 정부 내부의 운영 효율성이나 사업 목표 달성 여부가 대부분이고 매우 작은(예: 10%) 비중으로 ‘국민 만족도’를 반영하고 있다. 정부 부처의 편성과 업무분장도 공급자 관점에서 기능별(예: 행정안전, 과학기술, 보건복지), 산업별(예: 자동차, 조선, 유통, 에너지)로 나누고 있다. 참고로 ‘산업(industry)’은 동일 또는 유사 제품/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공급자 관점의 용어이다. 수요자 관점에서는 (‘산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더라도) 개인 욕구를 기준으로 의(류) 산업, 식(품) 산업, 주(거) 산업, 건강산업 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민 대상(G2C) 서비스는 출생, 교육, 취업, 결혼, 출산, 육아, 가계 운영, 은퇴 등 생애주기별로, 기업 대상(G2B) 서비스도 창업, 성장, 성숙, 폐업 등 단계를 지원하는 체제와 방식으로 편성,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수요자/소비자 관점의 역기능, 역효과

기업/대학/정부 등이 공급자/생산자 관점으로 편향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소비자/수요자 관점에 편향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업이 소비자가 당장 원하는 제품만 생산-판매한다면 장기적 수요 변화에 대응할 기술개발에 소홀할 가능성이 커진다. 소비자 요구가 타당하지 않거나 정당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을 수용한 비즈니스와 기업 전체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시적 유행이나 소비자 기호 변화에 맞춰서 생산 설비를 늘리고 제품을 생산했다가 위기를 맞는 기업을 볼 수 있다. 수요자와 시장의 기대/요구를 분석, 검토해서 거르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고(故) 스티브 잡스는 ‘소비자에게 묻지 말라’는 식의 태도를 견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소비자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beyond expectation’) 혁신을 이룩한다는 확고한 신념과 실행력이 있었던 것이다.


정부 또한 개별 기업이나 국민의 요구에 맞춰 정책을 수립, 실행한 것이 효율적이지 않거나 공정성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여러 기업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기반(인프라 또는 플랫폼)을 만드는 일에 투자하는 대신, 보이는 대로 또 산발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거나 가용 재원을 여러 기업에 균등하게 나눠주는 식의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국가 차원에서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전술(top-down)과 국민들의 기대/요구를 수렴한 사업(bottom-up)들을 연결하고 조율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생산자/공급자 관점에 소비자/수요자 관점 보강하기

두 가지 관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영역을 이해하고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을 늘려야 한다. 특히, 생산자/공급자 입장에서는 소비자/수요자의 진정한 요구/기대를 파악해서 제품, 교육 시스템, 정책 등의 개발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비자, 특히 충성고객과 상시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채널(예: 사이버 커뮤니티)이나 오프라인 채널(예: 사용자 컨퍼런스)을 개설하고 정기/수시 이벤트를 통해 지적 정보 교환과 정서적 교감을 유지하는 기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부나 기업의 R&D 사업에서는 소비자/사용자들이 시제품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리빙랩(Living Lab)을 운영하기도 한다.


제품/서비스 혁신 과정에 디자인 싱킹(DT: Design Thinking)을 적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접근이다. DT는 스탠퍼드大 디자인학부(‘d.school’)와 IDEO社가 발전시킨 것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고객의 욕구를 이해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공감(Empathize), 디자인(Design), 아이디어 도출(Ideate), 프로토타이핑, 테스트 등의 과정을 반복한다. 제조업체는 일시불 ‘제품 판매’ 방식을 리스나 구독(subscription) 같은 ‘서비스 판매’로 전환하는 식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는 판매 수익이 여러 번에 걸쳐 발생하도록 하면서 고객과의 상호작용 빈도와 강도를 늘리는 매우 적극적인 ‘소비자 관점’ 보강 전략이다. 도시바는 2015년, 전자제품을 제조-판매하는 것 외에 구독 모델(: 금융, 네트워크 서비스, TV 채널 운영 등), 콘텐츠 사업(: 음반 제작, TV 프로그램 제작 등), 추가 판매 상품(: 디지털 카메라 렌즈, 게임 SW) 등을 통해 소비자와의 상호작용과 수익의 빈도를 늘리는 리커링(recurring) 비즈니스를 확대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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