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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 흉내

내가 만들어낸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지 않기

by 김단한

나는 가끔 아주 잘난 '나'를 생성하곤 한다. 주로 자정에 만들어지게 되는 '나'는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대부분 갖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가 있다고 하자. 말 그대로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어떤 선택을 했다. 그것이 지금의 '나'다. 여기서 그쳐야 하는데, 생각은 점점 뿌리를 내린다. 기어이 반대의 선택을 한 '나'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만다. 우습게도, 지금의 '나'보다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그 선택을 한 상상 속의 '나'는 아주 조금 더 잘살고, 아주 조금 더 행복한 모습이다. 정말 우습게도 그렇다. 그럼 나는 알 수 없는 패배감에 물들어, 시작도 하기 전에 나가떨어지고 만다. 대체 왜 이런 걸까?


이 문제는 다소 심각하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매번, 내가 만들어낸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일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길, 어쨌든 나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누워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인데, 상상 속의 나는 너무나 멋진 차림으로 멋진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간이 찌푸려지고, 잠이 오지 않을 만도 하다. (그래서 내가 불면증을 겪고 있는 걸까? 그러나, 밀려드는 이 생각을 막을 방도를 아직 찾지 못했다, 무려 몇 년 동안!)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그럼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실제로는 B를 선택하고 싶었는데, 아주 근소한 차이로 A를 덜컥 선택해 버린 것은 아닐까? 나의 원래 선택은 사실 B였던 것이 아닐까!', 'A를 선택하지 않고, B를 선택했으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무언가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더 위험한 것은, 대체로 내가 상상하는 것이 전부 맞아떨어진다고 이미 마음속에서 확정을 내려버린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을 선택한 '나'는 승승장구한다. 어떤 어려움 없이,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팔딱 생동감 있게 지낸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어떤 일로 인해, 순식간에 패배자가 되어버린다. 나를 패배자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여기서 끝이면 좋겠는데, 얄팍한 감정은 사람의 심신이 야들야들해지는 어떤 시간을 통해서 깊숙하게 파고든다. 어릴 적 지우고 싶은 어떤 장면이나, 멋 모르고 뱉었던 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며 어색하게 굴었던 인생의 장면을 마구 송출시킨다. 벌떡 일어나 앉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나는 이마를 톡톡 치며 '멈춰!' 외친다. 그리 효과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어찌어찌 멈출 수 있다.


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일에 얽힌 일을 단 하나만 해낼 수 있다. 물론,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해낼 수도 있겠다만, 이것은 '정반대의 갈림길'에 놓인 문제이기 때문에, 하거나, 하지 않거나로 나뉜다.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이런 식이다. 우린 끝없이 선택하고, 후회하고, 돌아보고, 다른 선택을 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이렇진 않겠지, 자책한다. 내 인생의 중대사를 내 손으로 정하는데, 바로 내 손이 똥손임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은 그리 반갑지 않다. 그런데, 정말 나는 똥손일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게 된 것이 아닐까?


남과의 비교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와의 비교를 시작했다. 현실적인 부분에 타협하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일을 하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현실의 '나'를 괴롭힌다. 조금만 더 부지런했으면, 잠을 줄였으면, 할 수 있는 일 아니었니? 라며. 근데, 그것 또한 누구도 알 수 없다. 잠을 줄이거나, 시간을 쪼개서 그 일을 했다고 한들(물론 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의미 있겠지만), 인생이 바뀔 정도의 엄청나고 획기적인 무언가를 가져왔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생 자체가 장담할 수 없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그런 구성 속에서의 자잘한 선택을 해나가는 업을 가졌다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벌'이나 '수행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로 생각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얼마 전에 생각했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아 고요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그런 삶 안에서도 무수한 선택이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선택한 일이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수행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시간과 시간을 쪼개 더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할 뿐이다.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탓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지금 순간에 충실하자"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조금씩 숫자를 높여가면서 생각해 보니, 이 말 자체도 그때그때 다르게 와닿는 듯하다. 이십 대에는 이 말이 그저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들과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최우선, 내가 그곳에 속해있다는 것이 최우선이라 여겼다면, 지금은 뭐랄까. 친한 친구라도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 한번 만나는데 신중히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인생의 한 꼭지를 서로에게 내어주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맞춘다. 그런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최대한, '굳이' 문제가 되는 일을 만들지 않으며 만남을 잘 성사하기 위해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각자의 패턴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다. 각자의 삶의 유형이 있으며, 각자의 선택이 있다. 서로의 선택과 그 선택이 불러올 여러 가지를 그리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생각하려 한다. "모든 선택에 정답은 없음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한 것이 모두 다 정답!"이라는 청춘스러운 말을 뱉고 싶진 않다. 모든 선택엔 정답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선택하게 될 것이며, 그 선택에 있어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겠다. 내가 상상하는 또 다른 '나'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다른 선택을 하면서 조금 더 편한 길로 돌아가는 역할"을 맡는다. 아마, 여러분이 만들어낸 '어쩌면 지금보다 더 잘 살지도 모르는 나'는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현실을 살아내는 '나'에게 조금 더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을 우린 늦게나마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말을 나눌 것이다.


다양한 삶의 태도가 있고 방식이 있다. 같은 삶을 사는 인물은 없다. 우리의 내면은 시끄럽고, 우리는 시끄러운 내면과 고요한 외부, 혹은 시끄러운 외부와 고요한 내면의 균형을 끊임없이 조율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지겹지만, 어쩌겠나. 우린 이미 그렇게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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