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의 나는 누군가를 축하한다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했다. 당시, 나에게 제일 어려웠던 것은 축하와 위로였는데 이 두 가지는 비슷한 듯 달랐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진심 어린 마음'. 누군가를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것에는 진심 어린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나는 누군가를 축하할 만큼, 위로할 만큼, 진심 어린 마음을 갖지 않았던 건가?' 그러나, 이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누군가를 축하할 만큼, 위로할 만큼, 진심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문제는, 그 마음을 잘 빚어서 하나의 문장이나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의 변명이 붙는다. 일단, 나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 이것은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위로할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되는 마음이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축하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는, 상대에게 맞는 축하나 위로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작에 차고 넘치는데, 그 말이 행여나 상대에게 맞지 않을까, 혹은 상대가 만족하지 못할까 두려워 쉽게 꺼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저 내 마음을 전달하면 되는 순간에도 눈치나 보고 있으니, 자신감이 있을 리가 없다. 글을 쓰고자 하고, 쓰는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뱉어지는 말과 문장에 힘을 싣지 못하니, 아이러니하다. 이런 순간이 반복되면 마음이 좁아진다. 좁은 틈을 겨우 비집고 나오는 말은 예쁘지 않다. 여기저기 긁힌 말은 아주 최소한의 위로나 축하만 던질 뿐이다. 축하를 받아 마땅한 이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고, 내 앞에서 마음의 응어리를 토해내며 우는 이에게 위로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을 쉽게 피해버린다. 미안, 내가 말을 잘 못해. 이런 이상한 핑계나 대면서 말이다.
내가 정말 마음이 좁아서 위로나 축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이것저것 분석하며,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결과, 그들의 어떤 순간을 질투하기 때문에 위로나 축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순전히, 내 위로나 축하가 그들의 성에 차지 못할까 봐, 그들의 행복한 순간에 기억에 남을 한 획을 그어주는 게 아니라 오점만 남기게 될까 봐 말을 사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다가 영영 주변 사람들을 축하해 주지도 위로해주지도 못할까 겁이 났다. 어서 이 구렁텅이를 벗어나야 했다.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는 아주 쉬운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반응의 문을 활짝 열어놓기. 나는 외부와 나의 내부(감정이 있는 곳)를 연결하는 문을 활짝 열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이로 인해, 나는 뇌를 거치지 않은 즉각적인 반응을 행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울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달래주다가 같이 울어버렸다. 감정이 동화되면, 조금도 어렵지 않게 그를 위로할 수 있었다. 또,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한다면, 똑같이 활짝 웃으며 그를 축하해 주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까, 이렇게 반응하면 상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결과였다.
온몸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동안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감정을 나누는 것에 진심이라는 것이다. 혼자 슬퍼하거나 혼자 기뻐해도 충분한 일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심지어 나조차도, 이런 순간의 감정을 배로 지속시키기 위해 소리를 높인다. 또, 그 순간의 감정에 취해있는 한,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을 같이 즐겨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뿐이지 쟤는 왜 더 축하해주지 않아?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신랑과 신부 앞에 서서 행복한 축사를 건넨다. 내가 할 수 있고, 그나마 제일 잘하는 축에 속하는 것이 '상대를 위한 글쓰기'라는 장르이기에, 축사는 더없이 적절하다. 2024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의 결혼식으로 향했다. 결혼식이 있기 약 한 달 전부터 축사를 부탁받은 터라, 꾹꾹 눌러쓴 종이를 지참했다.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울지 않겠다는 다짐은 신부가 입장하자마자 무너졌다. 환하게 웃는 신부의 모습이 얼마나 예뻤던지, 나는 엉엉 울고야 말았다!
축사의 순서가 다가오고 나는 앞으로 나섰다. 나를 바라보고 선 신랑과 신부가 너무 예뻐서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이크의 성능은 최고였고, 긴장한 내 숨소리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선명한 음질로 송출되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둘을 생각하며 쓴 문장을 읽었다. 신랑과 신부는 가끔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때,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표현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 터라 가끔씩 소통이 틀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철학적인(?) 생각도 했다.
그들에게 건넨 축하는 오랫동안 남을 것이었다. 나는 그런 중요한 순간에, 내 문장이 적절한 역할을 했다는 것에 감격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앞으로 더욱 많은 이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일에 주춤거리지 않는 일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 써야 한다는 것도, 오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채워야 한다는 것도 다시금 느꼈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쓴 문장이 어떤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을지 모른다, 그렇게 굴러간 문장은 당신의 마음에서 제멋대로 뒹굴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바를 입은 문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당신이 내 문장을 어떻게 읽든 상관없다,라고. 그러나, 지금은 약간 생각이 다르다. 어떤 방식으로 구르더라도 본연의 메시지는 읽지 않는 굳건한 문장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지금 당장 문장이 필요한 누군가의 갈증을 충분히 채워줄 수 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나는 나에게 어떤 제약도 두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더 자유분방한 표현을 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