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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신과에 가는 것을 나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기

by 김단한

내 속의 수많은 '나'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싸워대는 계절이 돌아왔다. 어두워지면서, 모두가 어딘가로 돌아갈 때 나의 마음은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애당초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냥 거기 있는 것만이 전부면서도, 어딘가 바삐 가야 한다고 느끼고, 약속을 잊은 사람처럼 찝찝해한다. 이러다가 사그라드는 것이면, 잠으로 달아날 수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만. 나는 요즘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나'와 겨룬다. 몸을 전혀 쓰지 않고, 온전히 머릿속에서 싸우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남에게 폐를 끼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내가 나에게 폐를 끼친다. 아주 잔인하게.


싸움은 대체로 서로에게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이뤄지는데, 그렇게 따지면 뭐 직접적으로 맞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요?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다. 아니다. 집어던지는 것이 대체로 내 마음속에 쌓여있는, 그러니까 먼지를 묻히고 뒹굴거리는 옛 지난 기억들이라면 말이 다르다. 어느 누구 하나 온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흙탕, 똥밭에서 구르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너 이랬잖아, 너 저랬잖아, 너 이러기도 했네? 등의 말로 누가 누가 더 잔인한 옛 기억을 떠올리냐를 겨룬다. 나는 이쯤 되면, 이때가 거의 새벽 세 시 정도가 되는데, 아무튼 그때가 되면 완전히 지쳐버려서 이 둘을 잠재우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쓴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약을 꺼내는 것이다. 따끔따끔한 속, 싸움의 여파로 예민해진 위를 가라앉힐 약을 쭉 짜 먹으면, 그들은 한동안 잠잠하다.


벌써 이런 행동을 며칠이나 반복했다. 요즘은 사실 입만 열면 핑계를 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날씨가 너무 좋아지고 있으니까, 계절이 바뀌니까 마음이 붕 뜨나 봐, 나 항상 이때 꽃가루 알레르기랑 우울증이랑 같이 겪곤 했는데 말이야, 그냥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조급한가 봐, 일하면 조금 더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핑계들. 사실에 기반한 핑계. 요즘은 재주가 늘어서 자기 합리화에다가 이런 핑계들까지 덧붙인다. 게으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게으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흐지부지다.


그러게. 게으른 사람이 되려면 아예 게을러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아주 게으르지도 못하고, 아주 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열심히 일하려 들지도 않는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고, 이쯤 되니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허투루 들린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고, 자꾸만 내가 모르는 '나'들이 생겨나고 있어 혼란스럽다고 해야 할까? 봄이 되면 꽃봉오리가 톡톡 터지고 새로운 열매를 맺듯이, 내 마음에도 이제 막 새로운 것들이 살아나고 태어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 탄생이 기꺼이 반갑지만은 않다. 나는 새로 태어나는 것들 덕분에 더 늙은 기분이 들고, 더 게을러지고 있고, 더 무거워지고 있다.


원래도 지극히 감성적이긴 했지만 요즘은 더 심해졌다. 그냥 누가 툭 건들면 울 지경이다. 어떤 노래나, 영상을 보고 조금이라도 감동을 받거나 뭔가 벅차오른다면 금세 눈물이 뚝뚝 흐른다. 예전에는 그나마 눈물을 참거나 주변을 살펴볼 여유라도 있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말하면서도 울 수 있다. 말하기 전에도 울 수 있다. 속이 답답해서 숨을 크게 마신다. 숨을 쉬고 있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인데도, 숨을 크게 마시기 전까지는 마치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곤 한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프거나 죽어서 나를 떠나는 생각과 꿈을 꾼다. 분명히 내가 어딘가 고장 나고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심리학 박사이자 상담까지 진행하고 있는 이모의 도움을 받았다. 이모는 잠시의 통화로도 나의 현재 상태를 간파했다. 사실, 가족에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희한하지.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에겐 그렇게 잘도 이야기하면서 왜 가족에게는 말하기가 힘들까? 나는 어렴풋이 알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여긴다.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맞아,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내가 힘든 것을 알림으로 인해서 누군가 같이 힘들어지는 게 싫다. 우울을 옮기기 싫다. 다 각자 사는 게 힘들고 바쁘고, 괴로울 텐데 거기에 나까지 더해지는 건 싫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전문적인 도움을 다시 받기로 한다.


다니던 정신과에 전화를 걸었다. 정신과에서는 작년 10월부터 내가 오지 않았다고 했다. 두 달이 지나면 초진으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다시 가서 검사지를 작성해야 한댔다. 나는 그러기로 하고, 시간을 정했다. 갈 때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했던 정신과 진료실, 엄마를 따라온 어떤 아이가 '엄마, 여긴 미친 사람들만 오는 곳이지?' 크게 외쳤던 그곳,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공손하게 노크부터 하는 이들이 있는 곳. 나는 그곳으로 다시 간다.


나는 마음을 도닥인다. 그간, 수면유도제 없이 잠을 잘 잤고,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아도 하루를 잘 보냈고, 공황장애 약을 먹지 않아도 공황 없이 잘 지내왔다고 여겼다. 그랬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도움이 필요하고, 내가 나를 조금 더 관리할 수 있는 집중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더는 내 속의 합리화만으로 나를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약을 먹고, 상담을 하고, 조금 더 이야기를 편히 나누면서,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을 조금씩 내려놓아야지. 내가 나에게 미안해서라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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