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안은 위험하다고 이불 안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한 문장을 적어놓고, 나는 오랫동안 다음 문장을 이어가지 못했다. 심장 박동 횟수와 비슷하게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면서 쓰는 일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몇 달간의 불안과 우울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쓰는 일 자체가 나에게 불안을 준 건 아닌 듯하다. 나는 그저, '쓸 수 없는 상태'에 고여 있었고, 그런 나를 알고도 내버려 두었다.
정확한 기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의 세 달 동안 나는 차에서 생활했다. 물론, 잠은 집에서 잤지만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은 오로지 차에 머무르며 보냈다. 거창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패턴은 늘 같았다. 자기 직전까지 나에게 찾아오는 어떤 불안과 맞서다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퀭한 상태로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차 키를 챙겼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고, 다시 차로 돌아와 한적한 곳에 주차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 시간을 책 읽는 것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카페에 가기 전 도서관에 들러 대출이 허용되는 최대 권 수만큼 책을 빌렸다. 빌린 책이 많으니 반납 기간도 넉넉했는데, 나는 그 10권이 되는 책을 일주일 안에 모두 읽었다. 배고픈 사람이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어치우듯, 그렇게 책에 쓰인 문장을 먹어치우며 알 수 없는 허기를 달랬다.
대단한 문장들을 너무 많이 먹어서일까, 나는 이 시점에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데 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고, 젤리 몇 개를 먹는 것이 식사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급격히 말라가는 딸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엄마는 매일 아침 나를 밥상 앞에 앉혀놓았다. 두 숟가락 정도 먹고는 도저히 못 먹겠다며 숟가락을 놓기 일쑤였지만, 엄마는 나무라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엄마는 강조했다. 엄마 덕분에, 차에서 홀로 책을 읽다 쓰러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생각하니 아찔하고, 미안하고, 고맙다.
그 시점에는 그렇게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멍했고, 우울했고, 불안했다. 물론, 지금도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은 슬며시 '나 여기 있어' 고개를 들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나은 편이다. 차 안에 있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차를 두드리는 빗소리와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자꾸만 마음이 과거로 가는 듯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너무 무서웠고, 힘들게 버텨내고 있는 이 시간을 나중에 '후회'라는 단어로 간단히 덮어버릴까 두려웠다. 우울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그래서 더 불안했을지도.
뭐가 우울하고, 뭐가 불안한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힘들어했다. 지금도 우울이나 불안한 감정이 나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그때 온전히 앓아봤기에, 지금의 불안도 나는 견딜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알게 되었다.
과하게 생각하는 것,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에 예민한 것,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것, 현재를 걱정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삶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기로 나를 다독이는데도 많은 힘을 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나는 삶의 전체를 '불안'에게 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고, 나를 떠나지도 않는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하지만, '도대체 이 불안은 누가 보내는 거야?' 씩씩거리며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거울을 마주하는 꼴이니 어디 분풀이를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는 이 분야에 관련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불안이 사라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써내기가 어렵다. 그저, 나는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겪었다, 당신도 그랬나, 아이고, 우리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지나간 우울과 불안을 이야기할 수 있네, 다행이다, 잘 해냈다, 까지 쓸 뿐이다.
약값은 여전히 비싸고, 사느라 버느라 병원 갈 시간을 매번 놓치고, 이 불안이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나를 언제 또 나를 쓰러지게 만들까 두렵기도 하고, 이거 정말 고칠 수 있나 싶고 그렇다. 그래서, 쓴다. '불안한 나'에게 매몰되어 종일 굳은 상태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흘러야 마땅하니까, 조금씩 감정을 꺼내고, 내가 오늘 느낀 불안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것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않을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