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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더 잘 사용하기 위해선

선택하는 마음

by 김단한

2025년 추석은 아주 길었다. 개천절과 한글날이 겹쳐 기나긴 연휴를 탄생시켰다. 나는 추석에 달리 갈 곳이 없었기에, 하던 일을 계속하며 연휴를 보냈다. 평소보다 1.5배 힘들었지만, 연휴가 끝나고 난 후에 있을 달콤한 휴식을 그리며 버티고 버텼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갈 무렵, 나는 휴식을 택했다. 경주와 포항, 부산 중에 어디로 여행을 갈지 생각하다가 쉽게 결정하지 못해 제비 뽑기의 힘을 빌렸다. 스스로 섞고 스스로 뽑은 쪽지엔 '경주'가 적혀 있었고, 나는 '경주'로 향했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은 후엔, 은근한 불안감이 밀려온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제대로 된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 그런 불안감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이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생각을 전환하여, 인터넷 검색 창에 '경주'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검색해 본다. 맛집, 숙소, 카페, 볼거리. 그런데도 불안하다.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의 주소를 옮겨 적다가도, 이미 다녀온 이들의 후기를 보면 마치 다녀온 것 같은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건만, 이미 핵심은 다 경험한 것 같은 미묘한 마음이 나를 덮쳐오는 바람에 가보고자 했던 주소들을 하나씩 지워버렸다.


조용한 숙소를 고르고, 출발하기 전 마음을 예열했다. 기대하는 마음 반, 설렘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피곤함까지 안으니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 여행을 통해서 뭔가 대단한 것을 얻으려는 마음 자체를 줄이고 가볍게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는 것을 행하는 게 더 어렵다지 않은가. 나는 '경주'로 향하면서도 이 마음과 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길을 잃었다.


비가 많이 왔다. 구름이 낀 하늘은 잔뜩 흐렸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나는 오히려 이 날씨가 괜찮다고 여겼다. 내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날씨가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날씨가 너무 화창했으면, 화창한대로 슬펐을 것 같았다.


직접 운전해서 경주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경주 자체가 처음이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달렸다. 숙소는 아주 작은 마을의 끝자락에 있었는데, 숙소의 홍보 문구에 강조되었던 '조용한 숙소'가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듯 정말이지 가는 내내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고, 나는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딘가를 가려했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숙소 안에만 머물기로 했다. 밥을 먹고 고기를 먹고,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만 작은 불안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행을 '아주 잘' 해야 한다는, 이렇게 쉴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는 생각에 생긴 부담감이 불안감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 여행이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우려한 대로, 불안했던 그대로, 이 여행에 관한 좋은 추억은 남지 않을 것이며, 나의 다음 발걸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편안한 소파에 몸을 눕히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즈음, 나는 새로운 버릇이 생긴 참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안감을 회피하지 않고,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버릇은 의외로 괜찮았다. 불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피고, 그 표정을 짓게 하는 원인을 찾고, 불안감의 명도를 정확하게 하는 것은 나를 조금이나마 덜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실, 불안의 표정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직접 그 얼굴을 들여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불안은 아주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나는 그 불안과 맞서기보다는 불안을 달래는 쪽을 택했고, 그 방법은 자주 성공적이었다.


내가 지금 불안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여행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이고 완벽한 여행인지 모르면서, 나는 여행을 '잘하려고 했다'. 열심히 일하고, 일을 잘 마무리한 뒤에 쉬러 왔으면서, 나는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경주라는 좋은 곳에 왔으면서, 조용하고 깔끔한 숙소에 머무르면서, 맛있는 밥을 먹었으면서, 잘 쉬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뭔가 '더' 하려는 마음으로 불안을 지폈다. 불안의 표정을 살피고 나선, 불안이 거기 있음을 인정했다. 불안을 자꾸 피하려 들면 더 큰 불안이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한 원인을 알고, 불안을 인정하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다음 스텝이 꼭 불안하지 않기가 아니어도 괜찮다. 조금 더 불안해지더라도, 지금의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를 달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불안과 함께 슬며시 고개를 드는 여러 가지 감정들. 그 감정들 사이에서 어떤 감정을 중심에 세울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나는, 나를 덮쳐오는 피곤하고 불안하지만 설레는 감정 중에서, 피곤과 불안을 인정하되 설레는 감정을 한 걸음 더 앞세우도록 했다. 마음을 단번에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수히 돋아나는 많은 마음들 사이에서 어떤 마음을 쓸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것을 조금 더 단련시키는 노력은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자려고 누웠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수많은 별을 마주했다. 구름이 걷히고,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별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마음이 홀딱 빼앗겼다. 방금 전까지 대체 무엇을 불안해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안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여길 정도로, 나는 정신없이 별을 보고 또 보았다. 방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내 마음을 덮고 있는 가장 큰 불안을 걷어내는 상상을 했다. 구름 속에 잠시 숨어있었던 반짝이는 별처럼, 불안 속에 잠시 숨어있는 반짝이는 나를 찾아내는 상상을 하느라, 나는 조금 늦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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