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하는 마음
나는 요리에 취미가 없다. 재단하는 마음이 나의 성장을 막는 주범이란 주제로 글을 쓰려 마음먹었으면서, 이 글의 첫 문장부터 나를 재단하는 문장을 써낸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지만, 정말로 나는 요리에 취미가 없다. 모든 것을 눈대중으로 해결하려 들기 때문에 라면 하나를 끓여내는 일에도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어떨 때는 딱 맞는 국물과 적당한 면발 익힘으로 인해 환상적인 라면의 맛을 즐기곤 하지만, 어떨 때는 라면 국물에 빠져 수영해도 좋을 것 같다고 내가 나를 비꼴 정도로 물이 철철 넘친다. 또 어떨 때는, 이게 국물 라면인지 쫄면인지 헷갈릴 정도로 국물을 찾아볼 수가 없다.
'라면을 못 끓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라면 봉지만 봐도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알 수 있잖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고, 나는 그제야 라면 봉지를 확인했다. 친절하게도 라면 봉지 뒤에는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물을 얼마나 넣으면 좋은지, 물을 얼마나 끓이면 좋을지에 관해서 적힌 봉지를 보다가 나는 문득, 내 삶에도 이런 레시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아직도 잘 사는 것이나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해 잘 모른다. 모든 것이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적으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가끔 딴생각을 한다.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자는 마음을 가지다가도, 정말 사소한 일에 마음이 상하고 힘들어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끓여내는 라면처럼, 누군가가 매번 망치고 마는 요리의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에 '나'는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나', 결과적으로 그 결과가 결과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주범도 바로 '나'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런 생각에 한번 빠지게 되면, 오랫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괴감이나 죄책감에 쫓겨 다니게 된다. 결국, 그 꼬리의 가장 끝엔 '불안'이 있게 마련이고.
쉽게 재단하게 되는 건 내가 살아오며 겪은 여러 데이터의 평균값일 테다. 실제로 나는 동기부여를 하는, 그러니까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예열하는 시간을 굉장히 오랫동안 갖는 편이다. 그런 시간을 갖는다고 결과가 좋아지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그런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대부분 아니다. 늦더라도 동기부여를 하고, 예열을 완벽하게 마친 후 일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랫동안 흔히 말하는 어떤 '영감'이 나를 불쑥 찾아오길 기다리다가 글을 쓸 흥미를 잃어버린다거나 오히려 그 과정 안에서 지쳐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적이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숨죽여 있는 모든 시간을 '어떤 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허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니, 동기부여나 예열에 관한 시간을 피하고,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불안해한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테다.
그러지 않은 적도 분명히 많고,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분명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내가 진짜로 행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 적도 많지만, 나의 불안은 대부분 좋지 않은 쪽으로 나의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 보면, 지치고, 지치다 보면 하지 않게 되고, 하지 않으니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똑같은 상황을, 나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니, 나를 달궈내는 불 역시 아주 약할 수밖에.
이런 생각이 나에게 '재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만든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 어차피 하지 못할 거, 괜히 시간만 보내고, 결국 또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을 안다고 중얼거리며 이불 안에서 불안해한다.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도, 이불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고 그저 이불 안에서 발만 버둥거리는 것이다. 마음은 시끄러운데, 몸은 늘어져있는 그런 애매한 상태로 내가 나를 지치게 만든다.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미리 재단하는 마음은 일의 시작점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기에, 나는 이 마음을 알아채자마자 얼른 몸을 숨기기 바빴다. 숨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해 아무렇게나 몸을 구겨 넣다 보니 몸 군데군데 자잘한 상처도 생겼다. 상처는 훈장처럼 나에게 남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나의 모습을 다시 상기시키는 버튼 역할을 한다. 그러면, 또, 자책, 또 자괴감, 또 후회, 또 분노, 또 우울.
마음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는 레시피가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마음에는 계량컵이 존재하지 않으니 남들이 모두 인정하는 정석의 마음을 만들어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면 조금 뻔뻔하게 나가는 것도 좋겠다. 조금 넘칠 수 있는 불안이나 마음, 그리고 생각을 앞서 재단하기보다는 그 마음과 생각에 맞게 필요한 것을 더 때려 붓는 것은 어떨까. 물론, 불안을 기본 베이스로 하는 다양한 양념 감정들은 빼는 것이 좋겠다. 이미 그 쓰디쓴 맛을 봐왔으니 마음 재료의 이름만 보더라도, 이게 어떤 맛을 낼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 과하더라도 설탕을 쏟아붓는 요리사가 있듯, 나도 어쩌면 조금 더 괜찮은 맛을 낼 수 있는 마음 재료를 때려 넣어보자. 어떤 것이 나에게 괜찮은 맛을 선사할 재료가 될 것인지는 내가 '나'를 믿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더 좋겠다. 그러면, 누가 정했는지 모를, 그러나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하고, 그것이 표준 맛이라고 명명하는 기존 레시피 말고 오직 나를 위한 레시피가 뚝딱 만들어지지 않을까.
가끔 짤 수도 있고, 눈물 나게 매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나름대로 매력일 것이다. 너무 짜다면 달달한 것으로 입가심을 해볼 수도 있겠고, 눈물 나게 매운 걸 먹는다면 땀을 뻘뻘 흘리며 스트레스를 푼다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미리 재단하지 말자. 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것이니! 나의 출발점에 멀뚱히 서 있던 '재단하는 마음'이여! 이제 길을 좀 비켜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