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사랑스럽진 않아

장점은 사랑스러움과 별개

by 메이브


얼마 전에 사면된 좌파 정치인의 얼굴로 래핑된 자동차를 보며 K는 열변을 토했다. 아니,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나였다. ‘인당 50만원 하는 한우 고기 집에서 된장찌개 사진만 올려서 사람들한테 비난을 받고 있다’라고. 어쩌면 원래 정치 성향이 보수인 그의 호의를 조금이라도 샀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이런 말을 꺼냈는지도 모른다. 나의 화제 전환에 그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비싼 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식의 ‘척’이 싫어.”

뉴스를 잘 보지 않아도, 정치를 알지 못해도,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은 자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 특유의 비난이었다.

“마지막 날인데 우리 정치 얘기는 그만하자.”

언제나의 버릇처럼 내가 웃으면서 말한 게 잘못이었을까. K는 여느 때처럼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랑 나란히 걸으며 대화하는 마지막 순간을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는 K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를 깨닫기 위해 굳이 별도로 마련된 자리였다. K는 나에게 그래도 잘 보이겠다고 끼고 오던 깔창도 이번엔 끼지 않은 채로 약속자리에 나왔다. 깔창의 부재보다는 그가 나의 부탁을 들은 체도 않는 이 순간이 오늘 이 자리의 목적에 가장 충실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 건, 나중에 그와 걷던 장소를 멀리서 풍경으로 바라보면서였다.


“너는 지지하는 쪽이 어디랬지?”

K는 오늘로서 네 번째로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원래 정치 자체를 싫어한다’라고 처음 대답하는 것처럼 대답한다. 호기심을 살짝 섞었지만 결국은 나를 기억하지 않는 너의 무심함이 익숙하다는 듯이.

언제나 그는 나에게 질문을 하지만 답변을 기억하지 않는다.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 나는 그가 한 말들을 어디 꼬박꼬박 메모라도 해놓은 것 마냥 세세하게 기억하고 그에게 다시 알은체를 한다. 그러면 꼭 그가 말한다.

“너는 어떻게 그리 기억력이 좋아?”


나는 그의 단점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과장 좀 보태 밤새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그는 항상 나의 장점을 이야기한다.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습관에 맞게 최상급을 가끔 곁들여가며. ‘다른 여자들은 화낼만한 상황에도 너는 화를 안 내’, ‘내가 본 사람 중에 네가 제일 글을 잘 써’, ‘네가 나를 가장 많이 좋아해 줬어’. 나를 한 번도 누나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행동을 봤을 때 유일하게 언행일치가 돼서 신뢰가 가는 부분이었다.

떠올리면 무수한 단점들이 줄줄이 같이 떠오르는 사람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나는 이 사람만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평생 볼 일이 없는 사이’라는 사실이 사무친다. 같이 더 연애를 하고 싶고, 결혼으로 엔딩을 장식하고 싶은 관계도 아닌데 그렇다. 나를 장점과 함께 기억하던 이 사람은 나를 급속도로 잊을 텐데 나는 그 속도를 언제 따라가려나. 온통 그의 단점만 기억하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내 장점을 (적어도 얼마 전까진) 기억해 줬던 그 사람은 나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아이러니가 내가 뒤늦게야 경험하는 사랑의 본질 중 하나이려니, 쓴 입맛을 다시며 나는 생각한다.


그날 ‘진짜 마지막 순간’에 내가 그에게 손을 흔들고 그가 손을 흔들던 모습이 재생될 때마다 ‘아주 조금 더 순수했고 조금 더 젊었던 나’와 나는 조금씩 이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