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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30. 2020

최영 장군의 무덤에 왜 풀이 자라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들으면 최영 장군(1316~1388)이 떠오른다. 사실 이 말은 늘 청렴결백하게 대의를 위해서 살아왔음을 보여주었던 최영 장군이 하지 않았다. 아버지 최원직이 아들 최영 장군에게 한 말이었다. 최영 장군은 아버지의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늘 실천하려 애를 썼다. 최영 장군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 하였다.

전국적으로 최영 장군과 관련된 장소가 많다. 특히나 중부 지역은 최영 장군이 신격화되면서 많은 무속인들이 숭상하고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가 꼭 가봐야 하는 장소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한 최영 장군 묘다. 최영 장군이 죽임을 당하기 전 “나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뙤(풀)가 자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뙤는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도 산에 자리한 최영 장군의 무덤에 뙤가 자라지 않을 확률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또한 최영 장군이 죽음을 두고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는 이들은 비난하기에 바빴다.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윤소종의 경우 최영을 두고 “공은 한 나라를 뒤덮지만, 죄는 천하를 가득 채운다.”라고 말하였다. 잘한 점보다 잘못한 점이 더욱 크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많은 백성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최영의 죽음을 들은 백성들은 가게 문을 닫고 애도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설화로 만들어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했다.




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최영 장군의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데려와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하였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윗감을 맞이하고 싶었던 최영 장군은 먼저 자신의 목을 잘랐다 붙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어느 누구도 최영 장군과 같은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할 것을 예감한 최영 장군의 딸은 떨어진 아버지의 목에 재를 뿌렸다. 결국 최영 장군의 목은 다시 붙지 못하고 어이없게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으로 설화는 끝을 맺는다.
 
우리에게 너무도 어이없는 설화로 다가오지만, 고려말의 상황이 녹아 들어가 있다. 최영 장군의 경우 양광도도순문사의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면서 고려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된다. ‘조일신의 난’이란 세자시절 원나라에서 머물던 공민왕을 보필하던 조일신이 귀국 후 권력을 잡고 국정을 어지럽히다 축출된 사건이었다. ‘조일신의 난’ 이후 공민왕은 힘을 얻고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후 최영 장군은 공민왕을 도와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지금의 함경도에 해당하는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끊임없이 고려의 해안가에 올라와 약탈하던 왜구를 소탕하였다. 최영 장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왜구는 최영 장군의 군대만 나타나면,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 부르며 도망가기 바빴다.
 
대표적인 왜구 토벌 전투가 홍산대첩이다. 홍산은 지금의 부여 지역인데 1376년 왜구가 부여에 침입하여 공주까지 함락하였다. 논산에서도 왜구에게 고려 장수 박인계가 죽으며 큰 위기에 놓이자, 최영 장군은 우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60이라는 노구로 출정하였다. 왜구는 최영 장군이 출정했다는 소식에 좁은 길만 지나야만 맞닥뜨릴 수 있는 방어가 쉬운 곳에 자리를 잡고 대비하였다. 고려군이 좁은 길을 지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최영 장군이 군사를 독려하며 맨 앞에서 말을 타고 달려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 외에도 공민왕을 죽이려던 김용의 흥왕사 변을 비롯하여 원나라가 공민왕을 내쫓기 위해 덕흥군에게 1만의 군대를 주어 침략했던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고려 왕실의 수호자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죽자 고려 왕실은 힘을 잃고 신하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에 자신의 딸을 우왕의 비로 보내며 고려 왕실을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지켜준 인물이 최영 장군이었다. 1388년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라간 최영 장군은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성계의 세력이 점점 힘을 얻으며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고,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안팎으로 위기에 놓인 현실을 타개하고자 최영 장군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게 된다. 명나라에게 고려의 힘을 보여주면서, 이성계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이는 바라보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음) 그러나 이성계가 4불가론을 제시하며 요동 정벌을 반대하자, 최영 장군 자신이 정벌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하며 다른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이성계도 최영 장군의 참전 소식에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왕에서 터졌다. 우왕은 최영 장군이 요동 정벌을 나설 경우, 자신을 지켜줄 세력이 없음에 불안해했다. 우왕은 평양까지 따라나서며 최영 장군의 참전을 막았고, 그 결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할 수 있었다.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개성으로 내려오는 이성계를 막고자 최영 장군은 평양에서 급히 개경으로 되돌아오지만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군대도 없는 상황에서 이성계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을 강화도로 보내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 보냈다. 이후 합포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개경에서 참형시켰다.

위에서 말한 설화에서 딸은 우왕의 비였으며, 무능력한 사위는 우왕이었을 것이다. 고려를 위한 요동 정벌을 망치고 최영 장군을 죽인 우왕에 대한 백성들의 탄식이 녹아 들어있다.(왕을 욕하지 못하던 당시 상황과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책임을 묻던 현실이 반영되어있다.) 최영 장군이 목을 잘려도 다시 붙일 수 있는 능력은 최영 장군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함께 아쉬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유언처럼 무덤에서 뙤가 자라지 않는 모습은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최영 장군에 대한 아쉬움이며 자신들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물론 1976년 최영 장군 묘를 단장하면서 지금은 무덤에 뙤가 잘 자라고 있다.
 



역사적 인물인 최영 장군의 묘를 보기 위해서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20여 분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산길로 들어가기 전 7~80년대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마을의 입구를 지나가면서도, 맞게 올라가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물론 최영 장군의 묘를 알려주는 이정표는 보인다. 그러나 최영 장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데, 걷는 내내 좌측으로 닭을 풀어 키우는 집, 산 중턱에 위치한 밭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최영 장군의 묘를 알려주는 비석과 안내판이 보인다. 그 위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최영 장군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가 나온다. 산 중턱의 햇살 받기 좋은 곳에 최영 장군의 묘가 있으나, 규모가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는 않고 단출했다. 좌우로 묘비와 충혼비가 있고, 문석인 한 쌍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 앉아 잠시 생각해보니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묘는 잘 관리되지만, 주차장에서 묘까지 가는 길은 정비가 부족했다. 만약 묘에 뙤가 없었다면 최영 장군에 대한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컸을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최영 장군의 묘를 알려주는 안내판까지 정비되지 않은 모습이 오랫동안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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