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후금과 맺은 ‘형제의 맹약’ 이후 두나라는 어떤 행보를 걸었나요?
조선은 실질적인 피해가 없었음에도 오랑캐인 만주족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사대부들은 조선을 중국 다음가는 문명국으로 생각하며 오랫동안 만주족을 아래로 생각했으니까요. 어찌 보면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 국제 질서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더욱 문제는 연신 후금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며 부르짖으면서도 국방력 강화 등 실질적인 변화는 없다는 점이었어요.
반면 후금은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는 주변국에 황제국임을 알렸죠. 조선에게도 이제는 형제국이 아닌 속국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죠.
두 나라의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네요. 그렇다면 병자호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마침 인조의 비였던 인열왕후가 죽어요. 청은 인열왕후의 죽음을 조문하는 동시에 청 태종의 존호를 알리기 위해 용골대와 마부태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냈죠. 문제는 이들이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면서 예의 없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아요. 청의 위상을 보여주어 조선이 스스로 무릎을 꿇도록 말이죠. 그러나 청에 적개심이 컸던 조선은 위축되기보다는 크게 반발했죠.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용골대와 마부태는 청으로 급히 도망가다가 평안도 관찰사로부터 청의 침략을 대비하라는 문서를 훔쳐서는 청 태종에게 바치죠.
청 태종은 문서를 보고는 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선을 먼저 굴복시켜야겠다고 확신하고는 1636년 12월 9일 직접 12만의 대군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합니다.
조선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나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청군의 선봉 마부태는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피해 빠른 속도로 남하해요. 반면 조선 정부는 청의 침입한 지 3일 뒤인 12일이 되어서야 알게 됩니다. 그리고 13일 평양, 14일 개성을 통과했다는 비보가 연이어 들려오죠. 너무도 빠른 속도로 남하하는 청군에 조선 정부가 취한 것은 정묘호란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마저도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으면서 뜻대로 되지 않아, 간신히 소현세자 등 왕족 일부만 보낼 수 있었어요. 인조는 청군이 침입한 지 6일 뒤인 15일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하게 됩니다. 인조는 1만 2천여 명의 병사들과 40일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버티죠.
지방에 있는 조선군이 남한산성으로 달려오지는 않았나요?
인조는 각도에 근왕병을 이끌고 달려오라고 명령했죠. 전라감사는 6천 명의 근왕병을 모집한 뒤 전라병사 김준룡과 올라오자 승병 등이 합류하며 8천 명에 달하게 됩니다. 이때 김준룡은 선봉장으로 2천의 병력으로 용인 광교산 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하자,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한 청장수 양굴리가 5천의 병력으로 공격해요. 이 과정에서 김준룡은 양굴리를 사살하며 최초의 승리를 거두지만 식량과 무기의 부족으로 철수하고 맙니다. 이후 근왕병들은 청군에 의해 북상하지 못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는 데 그칩니다.
인조는 근왕병이 오지 않는 소식에 낙담했을 것 같아요.
근왕병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진 남한산성의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와 항복한 뒤 훗날을 도모하자는 주화파로 나눠지게 됩니다. 싸우자는 주전파의 대표적 인물은 66세의 나이로 60리 눈길을 걸어 남한산성에 들어온 김상헌이고, 항복하여 훗날을 도모하자는 인물은 정묘호란 때 형제의 맹약을 이끌어낸 최명길이었죠. 인조는 깊은 고심 끝에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면서 항복문서를 누가 작성할지를 물어요. 이때 아무도 나서지 않자, 최명길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이 쓰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김상헌은 크게 반발하면서 최명길이 쓰는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향해 3번 무릎을 꿇고, 3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청의 신하가 되었음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내고, 매년 공물을 보내겠다는 정축화약을 맺죠.
아들을 보내는 인조의 마음이 좋지 않았겠어요.
인조는 소현세자가 먼 길을 가야 하는 일이 안쓰러워 청나라 예친왕에게 세자를 온돌방에서 재우도록 부탁하죠. 세자에게는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라고 당부의 말도 합니다. 저는 연인이라는 드라마에서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정말 준비를 많이 한 드라마라고 느꼈죠.
그런데 인조와 소현세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나요?
소현세자가 청에 끌려간 이후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소현세자 일행은 청나라로부터 머물 장소를 제공받지만,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받지 못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어요. 이때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은 청나라 귀족 부인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형성하고는 조선 물건을 팔아 자금을 마련합니다. 그렇게 마련된 돈으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땅을 사서 농작물을 심어 더 큰 이익을 창출한 뒤, 끌려온 조선인들의 몸값을 지불하며 자유민으로 만들어주었죠. 수십만 명이 청에 포로로 잡혀 와 노예로 지내는 상황에서 소현세자의 행동은 큰 희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조는 그로 인해 늘 자신과 비교되는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됩니다. 소현세자가 조선인을 노예에서 해방시킬 때 인조는 청에 붙잡혀 도망친 사람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면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해서, 군졸들로 하여금 압록강에서 조선 백성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거든요. 또한 소현세자가 청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기보다는 서양 문물을 수집하는 등 청을 모델로 조선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도 불만이었어요.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청의 큰 신임을 얻은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뺏길까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인 건가요?
사실 그 부분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추정할 뿐이죠. 소현세자 부부가 8년간 심양에서 생활할 때 강빈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인조는 강빈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볼모 생활을 끝내고 돌아올 때도 백성들과는 달리 환영하지 않았죠. 그리고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습니다. 얼마 뒤에는 강빈이 인조의 후궁 조씨를 저주했다는 모함과 더불어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죄명으로 사사되고요.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둘은 제주도로 유배 생활 중 죽었다는 점에서 인조가 죽인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심신이 약화된 상황에서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소현세자의 죽음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변하는 국제사회에 맞추어 조선이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조 이후 조선은 계속 청을 무너뜨리고 명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북벌론을 주장하죠. 이룰 수 있는 현실성 여부를 떠나 맹목적인 사대주의 모습과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는 시사점이 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