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은 정말 많이 들어보지 못한 국왕이에요. 현종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
현종은 예송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크게 드러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 국왕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몸부림쳤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의 무게감이 약한 것도 사실이죠. 현종은 효종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가 있던 시기에 심양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효종이 즉위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10년 후에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이 무렵에는 서인과 남인이 상호 존중하며 비판하던 풍조가 무너지던 시기였어요.
왜 서인과 남인 관계가 악화되었나요?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면서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당독재보다는 붕당의 가져오는 이익이 크다고 믿었죠.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아주 오랫동안 당연하게 느껴지던 양반의 권위와 기득권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제일 좋은 해결책은 백성과 나라를 위한 정치로 양반 스스로의 권위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죠. 오히려 권력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흘러가요. 이를 위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국왕마저 자신들이 만든 틀에 넣어 움직이려고 하게 됩니다. 당연히 현종은 신하들의 이런 행태를 제재하고,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을 경영하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쉽지 않았죠.
왜요?
예송을 통해 살펴볼까요? 상복을 얼마나 입는지를 두고 붕당이 다툰 예송이라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왜 저런 것을 두고 다투지? 그 시간과 노력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조상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 집안의 두 어른이 다툽니다. 음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두고 말이에요. 나머지 가족들은 “왜 저런 것을 두고 싸우지? 어디에 두든 상관이 없는데 말이야.”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바꿔볼까요. 어느 어른의 뜻에 따라 음식이 놓이는지에 따라 집안의 실세가 누구인지를 판단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네요. 정확하게 예송이 어떤 일인가요?
인조가 43살에 15살의 계비 자의대비를 맞아들여요. 그렇다 보니 자의대비는 효종보다 더 오래 살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 거죠. 조선 예법을 담은 <국조오례의>에는 효종처럼 작은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은 경우 어머니가 입어야 할 상복에 관한 규정이 없었어요. 이때 윤휴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들은 왕과 사대부는 엄연히 다름을 강조하며, 효종을 적장자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례>를 근거로 자의대비가 3년 동안은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반면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은 효종이 사대부의 예를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의례>에 따라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해요.
서인과 남인 어느 한쪽도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갈등이 커지자, 영의정 정태화가 <대명률>과 <경국대전>을 근거로 부모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상관하지 않고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며 기년복을 주장해요. 결국 즉위 초 주도권을 갖지 못했던 현종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설을 채택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해예송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종은 신하들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네요.
네. 아무래도 그렇죠. 그러나 지구의 기후변화로 조선시대 최악의 흉년이라고 불리는 경신대기근도 현종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당시 지구 온도가 낮아지는 소빙하기로 연이은 흉년과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했어요. 중국 강남의 감귤 농장은 추위로 종자가 끊겼고, 에티오피아는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았어요.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죠. 현종 11~12년에는 가뭄과 전염병으로 전체 인구의 약 10%인 100만 명 정도가 죽었어요. 오죽하면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허적은 기근으로 백성의 고통이 끝없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다고 말했을까요?
경신대기근 처음 듣는데, 너무도 끔찍하네요. 조금만 더 설명해주세요.
충청감사 이홍연은 순례라는 여노비가 5살 된 딸과 3살 된 아들을 잡아먹었다는 보고를 올려요. 깜짝 놀란 현종이 순례를 심문하게 했고, 사실로 밝혀져요. 자식을 죽여서 먹었다고 실토한 순례의 몰골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마치 귀신같은 모습이어서 바라보기 어려웠다고 해요.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에요. 그것도 가족 간의 사랑을 강조하는 조선에서 말이죠. 이뿐만이 아니라 소도 전염병으로 종자가 끊길 위기에 처하면서 자연스레 제대로 농사를 짓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 정도의 재해라면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네요. 그렇다면 오히려 현종의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나라 경영을 잘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현종은 15년 재위했는데,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죠. 현종은 효종처럼 북벌을 외치지 않았지만,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했기에 강화도에 화포를 설치하고, 훈련별대를 창설해요.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인구수 증가와 조세 징수 체계를 확립하는 노력을 보여요. 예를 들어 양민이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금지하고, 도성 안에 있던 두 사찰을 폐지하여 동자승을 환속하게 해요. 또한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여 천민이 합법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오가작통제 규정을 제정하여 유민 발생을 막아요. 대동법도 호남으로 확대하며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현종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쳤는지도 모르겠네요.
왕권 강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펼쳤는데요?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가 불거져요.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서인은 자의대비가 작은아들의 부인이기에 상복을 9개월 입어야 한다고 주장해요. 현종도 15년간 국정을 이끌어온 만큼 즉위 초의 기해예송 때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죠. 현종은 자신을 지지해 줄 외척의 힘을 키워왔고, 서인의 중심축이던 송시열과 거리를 두면서 서인의 힘을 많이 약화시켰거든요. 이를 눈치챈 남인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복을 주장해요. 그 결과 기해예송에서 참여했던 허목과 윤휴 등 남인 출신이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기년복이 채택돼요. 특히 현종의 역할이 컸어요. 현종으로서는 아버지 효종이 권위가 높아져야만, 자신도 국왕으로서 권위와 정통성이 부여되기 때문이에요. 강하게 기년설을 내세운 현종의 뜻대로 기년복이 선택되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에 앉으면서 새로운 변화가 불어옵니다. 이것을 갑인예송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변화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왜요? 혹시 현종이 죽었나요?
갑인예송 이후 한 달 후 현종은 과로로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학질로 죽어요. 이때의 현종 나이가 34살에 불과했으니, 참으로 안타깝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조선을 경영한 끝에 비로서 왕권을 강화하며 자신이 구상하는 조선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것도 한창 젊은 30대니까요. 하지만 현종의 뜻은 그의 아들 숙종에게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