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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묻고 답하기

by 유정호

정조도 국왕으로 즉위하기 어려웠다고 들었어요.

조선시대 유일하게 국왕을 죽이겠다고 궁궐에 자객이 난입한 사건이 정조 때 벌어집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본 정조가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되잖아요. 그래서 정조는 세자 시절 대리청정할 때 노론에게서 조정에서 하는 모든 논의를 알 필요가 없으니 가만히 자리만 지키라고 말을 듣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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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죽이려는 일이 있었다고요?

노론의 홍계희 가문이 벌인 일인데요. 정조가 즉위하면서 백부와 아버지가 귀양을 가게 되자 홍계희 손자 홍삼범은 힘이 장사였던 전흥문을 포섭해요. 많은 돈과 아내를 주면서 말이죠. 또한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하여 궁궐에 진입할 방안을 마련한 뒤 20여 명의 장졸을 끌고 궁궐로 들어가요. 이 과정에서 궁궐에서 일하던 관리와 나인들도 포섭되어 자객을 경희궁 존현각까지 안내합니다. 다행히도 지붕에 있던 자객들이 발각되면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 집안은 이후에도 무속인을 동원하여 정조를 저주하는 주술을 행하고, 정조의 이복동생이던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며 역모를 일으켜요.

이 외에도 정감록에 기반한 역모도 있어요. 정조 3년 역모죄로 잡혀 온 하동 사람 문양해라는 사람이 지리산에서 인간으로 변한 500살의 사슴 녹정과 400세의 곰 웅정을 만났다고 진술해요. 이들은 나주에서 유, 이, 고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조선이 셋으로 갈라져 100년간 싸우다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통일한다고 예언했다고 해요. 정감록에 기반한 최초의 역모 사건이죠.


정조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이겨냈나요?

정조는 자기 외에는 누구도 믿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죠. 그래서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 능력을 키우는 데 진심을 다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학문을 익혀서 누구와 토론해도 지지 않을 실력을 갖춥니다. 자기 몸도 지킬 수 있도록 무예 연마도 게을리하지 않았죠. 특히 활을 잘 쐈어요. 100발을 쏘면 98~99발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100발은 일반 장수도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의 체력이 요구되고, 98~99발은 양궁 국가대표들도 맞추기 어렵다고 해요. 그런데 정조는 신하를 배려하는 측면에서 1~2발을 일부러 맞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아팠을 때 의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어서 의술도 익혔어요. 그 수준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동의보감에서 가장 중요하고 백성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의술을 선정한 <수민묘전>을 편찬하기까지 합니다. 정조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개인의 역량이 아닌 법과 제도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많이 들어봤어요. 규장각, 장용영 등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했다고 말이에요.

정조가 즉위할 무렵 조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며 정조를 지지하는 시파와 사도세자가 죽어 나라가 바로 세워졌다고 여기는 벽파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정조는 자신을 지지하고, 구상한 계획을 실행해 줄 관료를 육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선왕들의 책과 유품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친위 세력을 형성하는 데 있었죠. 초계문신제로 이들이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왕과 아침저녁으로 만날 수 있고, 왕과 신하들이 나누던 대화를 기록할 권한도 주었죠. 그 결과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한 이덕무, 발해를 기록한 유득공, 실학의 대표 학자 박제가, 거중기를 이용해 수원 화성을 건설한 정약용 등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됩니다.


장용영은 정조가 군대를 육성한 거죠?

정확히는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부대입니다. 서울과 경기도를 책임지는 5군영은 벽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정조는 늘 불안했어요. 좀 전에 말씀드렸던 궁궐에 자객이 들어온 일을 계기로 왕을 호위할 숙위소를 만들어요. 이후 점점 규모와 기능이 확대하여 장용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30명에서 출발한 것이 나중에는 18,000명으로 확대되죠. 이뿐만 아니라 5군영 중 수어청과 총융청을 폐지하여 군영이 사병화되지 않도록 하고, 군영의 장군을 임명할 때도 병조판서를 거쳐 반드시 임금이 재가하는 절차를 확고히 합니다.


왕권 강화를 통해 정조가 하고자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정조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바로서기를 바랐어요. 특권을 누리면서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막대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일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시전상인이었어요. 그들은 나라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대신 정부의 허가 없이 장사하는 난전의 활동을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부여받았어요. 문제는 이들이 일부 관료들과 결탁해서 물건을 독점한 뒤 가격을 멋대로 올려 이익을 취한 데 있어요. 영조도 금난전권을 폐지하려다 이들과 결탁한 관료들의 반대로 포기할 정도였죠. 지금으로 따지면 정경유착이 너무 심했던 거죠.

정조는 직접 금난전권을 폐지하면, 반발이 커질 거로 생각했어요. 공론화를 시켜 정경유착을 합리화할 수 있는 명분을 제거해야 한다고 본 거죠. 그래서 좌의정이 제시한 정책안을 공론화시켜 반대 세력의 반발을 최소화했어요. 그리고 재위 15년이 되던 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합니다. 이것을 신해통공이라고 해요. 그 결과 난전이라 불리던 영세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경제활동이 활발해져요. 당연히 백성들은 비싼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언제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국가도 난전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면서 국고가 풍족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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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상인과 결탁했던 관료들이 가만있었나요?

아니요. 금난전권으로 이익을 취하던 시전상인과 관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죠. 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요. 신해통공으로 경제가 어려워졌다며 정조를 압박하는 정치 공세를 이어갔어요. 예를 들어 김문순은 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납품하던 상인이 없어지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냐며 강력하게 비판했죠. 시전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는 철시 투쟁하며 시위를 벌였고요. 심지어는 상인 70명은 신해통공을 제안했던 체제공이 근무하던 수원을 찾아가 폐지를 요구했어요. 그러나 정조는 흔들리지 않고 정책을 이어가면서 조선에 자본주의 발달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식민지 시절 일제는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조선을 근대화시켜 발전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주장해요. 말도 안 되는 일제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로 정조의 신해통공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정조가 죽으면서 모든 개혁이 수포가 되지 않나요?

그 부분이 매우 안타깝죠. 정조는 재위 기간 여러 개혁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수원 화성을 건설합니다. 또한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에 머물면서 아들이 국가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계획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1800년 종기로 4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맙니다. 물론 조선 왕들의 평균수명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정조가 더 살았다면 훗날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죠. 그래서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근에는 술과 담배로 인해 건강이 악화한 것이 사망의 주된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정조는 누구보다 담배를 사랑해서 “담배가 유익한 점을 서술하라.”라고 과거 시험문제를 출제할 정도니까요. 술도 많이 마셨고요. 젊고 건강하면 술과 담배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 술과 담배가 면역력을 크게 악화시키거든요. 병에 걸려도 잘 낫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술과 담배를 줄이거나 끊는 삶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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