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누가 왕이 되었나요?
다음 왕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순원왕후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자손 이원범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어요. 사실 철종은 원칙적으로는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어요. 역적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후궁에서 태어난 은언군의 손자였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할 정도로 일반 농민보다도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보통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어 왕이 될 교육을 받아야 했던 것과 너무도 동떨어진 삶을 살아갔으니까요.
그래도 왕족인데 왜 평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 되었나요?
시작은 영조에게 있어요. 정조의 안정적인 즉위를 위해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어요. 석방된 후 낮은 벼슬을 살던 중 아들 상계군이 홍국영의 누이였던 원빈 홍씨의 양자가 됩니다.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삼으려다 쫓겨나면서 은언군도 강화도로 유배 보내져요. 순조 때는 신유박해 때 아내와 큰 며느리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면서 은언군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집안이 풍비박산되면서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은 강화도에서 노비 생활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죠. 먹고 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생활할 때 철종을 낳습니다. 그러나 철종의 큰형이 역모에 관련되면서 다시 강화도로 유배 보내져 살다 보니 왕이 될 가능성이 1%도 없었죠.
역적의 집안이니 왕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나요?
가장 큰 원인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은 데 있죠.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가 관료들을 소집하고는 다음 왕을 추천하라고 합니다. 이때 세도가문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철종을 선택한 거죠.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친인척도 없는 철종이야말로 허수아비 왕으로 가장 제격이었으니까요. 또한 철종의 나이가 19살이어서 수렴청정이 가능한 점도 있었고요.
이런 사실을 모르던 철종은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매우 당황했겠어요.
맞아요. 철종은 평소와 다름없이 산에 올라 땔감을 주어서는 내려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 집에 많은 관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뒷걸음칩니다. 형처럼 죽겠구나 싶은 거였죠. 철종을 모시러 온 영의정이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음에도 철종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해요.
정조도 사도세자가 역적의 자손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즉위했잖아요. 왜 철종은 예외인 거죠?
역적의 자손은 왕이 될 수 없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역적의 자손이 아닌 것으로 만들면 간단히 해결되지 않나요. 은언군 내외의 작위를 회복시키고는 선조가 생부를 덕흥대원군으로 봉작한 사례를 제시하며 철종의 아버지를 전계대원군으로 봉합니다. 그리고는 ‘철종이 어려움을 많이 겪어 거의 촌아이와 다름이 없다. 옛날의 제왕 중에는 민간에서 성장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고 백성을 위한 정사를 펼친 사례가 많다. 지금의 주상도 백성의 일을 익히 알고 있다.’라면서 철종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잘할 것이라고 추켜세워줍니다.
또한 철종이 어린 시절 <통감>, <소학>을 읽어보았으나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고 말하자, 소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 담겨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으니 앞으로 배우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죠. 관료들은 철종의 말을 무시하며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안동 김씨는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하고는 주요 관직을 독차지합니다.
저는 철종이 한 글자로 읽지 못하는 일자무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이것은 일부러 왜곡된 사실일 수 있겠네요. 철종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려고 했나요?
철종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보여요. 2년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 관서 지방에 기근이 심해지자 11만 냥을 백성을 구호하는 데 사용하고요.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여주 1천 호를 구휼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함흥 화재와 영남의 수재 지역 주민을 돕는 일을 하죠. 또한 부정·비리를 저지르는 관리를 강하게 처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죠?
오히려 철종이 강화도에서 사랑했던 양순이를 잊지 못해 국가와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백성들이 많았어요. 진주 민란처럼 전국적으로 봉기가 많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양순이와의 첫사랑은 드라마로 봤던 기억이 나요.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가요?
야사에 따르면 강화도령으로 불리던 시절 철종은 혼인을 약속했던 양순이를 무척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왕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강제로 헤어져야만 했지요. 철종은 양순이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철종이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갔던 만큼 양순이는 양반 규수가 아니었거든요. 즉 왕비가 될 자격이 없었죠. 무엇보다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자기 가문의 여식을 왕비로 들여야 했고요. 그래서 안동김씨는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양순이를 죽여버렸다고 해요.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안타깝죠. 하지만, 양순이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동정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금의 위로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강화도에서는 철종이 강화도령으로 살던 곳에 용흥궁을 짓고, 강화도령 첫사랑 길을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 이곳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민란도 많이 발생했다고 했잖아요. 어찌 보면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진주민란은 진주목사 홍병원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수탈에 봉기합니다. 이들은 각각 재정이 부족하다며 백성에게 강제로 많은 세금을 징수합니다. 횡포를 견디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던 유계춘과 이계열은 장날을 이용해 봉기를 일으켜요. 수많은 군중이 진주 관아로 몰려오자 진주목사는 겁을 먹고 용서를 빕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군중은 병마절도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병마절도사는 하급 관리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죠.
분노한 군중은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고,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관리를 죽여요. 그러나 이런 행동으로 오래도록 지속되어 곪을 대로 곪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수만 명의 진주사람이 진주성으로 몰려와 해결을 촉구했어요. 이에 조선 정부는 진주목사와 병마절도사를 파직하고는 박규수에게 진상조사를 하라고 안핵사로 파견합니다.
박규수는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나요?
박규수는 ‘백성이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은 삼정이 모두 문란해진 탓입니다.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백성뿐입니다.’라며 정확하게 문제의 원인을 진단합니다. 그리고는 삼정의 문란을 해결할 방안으로 특별 기구를 만들자고 주장해요. 그로 인해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죠. 철종은 이처럼 자기 뜻대로 무엇하나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절망하다가 33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5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