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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기리 Oct 26. 2024

수채화 같은 당신이 좋았어.

진하지 것을 좋아합니다. 수채화 같은 그런 것들을요. 전시회에 가서 수채화 같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편안해집니다. 화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흐릿한 물감 속에서 조금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옅은 선이 하나씩 하나씩 어울릴 때마다 잔잔한 물결을 만드는 것만 같아 고요함을 알 것만 같습니다.


선명한 것들은 되레 부담스럽습니다. 선명함은 빛이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어두운 모습을 여력히 잘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선명함은 그림자를 부각하게 만듭니다. 드리워진 그림자를 유심히 보고 있으면 무서워집니다. 어두운 부분은 우리가 평소에 꽁꽁 숨겨두었던 감정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무엇을 숨겼는지는 각자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그것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하나같이 꺼려할 것임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어두운 면을 들춰내는 것을 좋아하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의 화두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러고선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 웃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웃음 속에서 갖춰진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합니다. 그 화두에는 본인도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그런 것들로부터 멀리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멀리하는 대신에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숨겨두었던 외면받은 감정일지 몰라도 이것 또한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어엿한 한 부분일 테니깐요. 그래서 소외받은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더 가는듯합니다. 길을 걷다가 세월에 흔적이 무던히 쌓인 담벼락이라던지, 언제부터 홀로 이 자리를 굳건히 지켰는지 알 수 없는 나무 같은 것들을요. 양손 벌려 한아름 감싸 않지 못할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평안함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해져버린 옷들에는 평안함을 넘어 정이 들어버렸습니다. 해졌음에도 쉬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몇 해 동안 함께 하면서 고스란히 추억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래된 것들 고이 옆에 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애착일련 지는 알 수 없지만 익숙함이란 수십 번의 밤을 보내더라도 그리운 감정인 것 같습니다. 한동안 잊고 살더라도 옅은 숨만으로도 그때의 감정과 추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리워할 대상이 옆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애틋함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두터운 옷을 정리하면서 옷깃에 남아있는 긴 머리카락은 그리움이었는지 애틋함인지는 알 수 없어서 한동안은 옷정리를 미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감정이었는지, 한동안 숨겨두었던 소외된 기억이었는지 선명했던 것들이 연해지도록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연해질수록 흐릿했던 것은 되려 선명해져 시간의 흔적으로도 지우지 못한 기억 하나가 떠 올랐습니다.


"너는 내게 수채화 같은 사람이야.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아서 살며시 다가오는 네 걸음을 내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거든. 비록 선명한 표현은 없지만 옅은 미소만으로도 네 감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당신이 좋았어. 수채화 같은 옅은 당신의 미소가 좋았어."


(@912_guk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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