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마음 살리기
아침이다.
매일 같은 의식을 치르듯이 오른쪽 눈에 손을 대 본다. 부드러운 살결은 만져지지 않는다. 건조해서 갈라진 손톱에 뻣뻣한 반창고의 거즈가 걸릴 뿐이다.
'꿈이 아니었어.'
매일 아침,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삶. 과연 괜찮은 걸까.
산책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선글라스를 골랐다. 문을 여는 순간, 문득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어 외투를 벗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요즘은 이런 날이 잦다. 갑자기 다 관두고, 숨고 싶은 날.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언젠가 넘을 수 있는 산일까.
다음이 없는 벼랑 끝일까.
혹여 벼랑 끝이더라도, 이를 악물고 버티면—한 걸음 물러서서 벼랑을 등지고 설 수 있는 날이 올까.
버텨야 한다.
버티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
운동을 시작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기뻤다. 잠시라도 내 얼굴에 눈이 몇 개 달렸는지 따위 잊을 수 있어서.
수술 후에 급격히 떨어진 체력 탓인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숨이 차고 땀이 났다. 그래도 기분 좋은 땀을 흘렸다며 만족하려는 찰나, 텅 빈 눈구멍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신체의 일부를 제거하면 갈 곳을 잃은 분비물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새어 나올 수 있다고. '너도 예외는 아니야'라고 알려주듯, 눈구멍 아래에 송골송골 진물이 맺히며 따끔거렸다.
'눈에서 땀을 흘리는 주제에 운동은 무슨.'
책을 펼쳤다.
한참 회사일로 바쁠 때,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꼭 읽어야지 다짐했던 책들인데. 이상했다. 시련 극복기를 읽어도, 애달픈 이야기를 읽어도, 내가 더 힘들고, 내가 더 슬프다는 생각이 차 올라서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노트를 꺼냈다. 일기라도 쓰면 좀 낫겠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무엇부터 쓸지 생각에 잠겼다. 수술을 받은 이후로, 내 기억은 계속 같은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불속에서 움츠린 채, 수술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며 울었던 그날 밤으로.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몸이 죽어.
하지만 수술을 받으면 마음이 죽어.'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맴돌다 노트 앞으로 돌아왔다. 얹혀 있던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거칠게 글을 써 내려갔다. 눈꺼풀과 눈의 제거를 권고받은 이후의 삶을 더듬다 보면 문득문득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글썽이는 왼쪽눈을 보고 서둘러 따라 하듯, 오른쪽 눈두덩이도 붉게 달아오르며 시동을 걸었다. 눈 주변이 보기 싫게 울긋불긋해지더니, 반창고에 누런 물이 스며들었다.
'이제는 마음껏 울 수조차 없구나.'
반창고를 떼고, 눈물인지 진물인지를 닦으며 계속 써내려 갔다.
그래도 그렇게 한참을 토해내고 나니, 아주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영원히 숨지 못할 거라면, 완전히 꺼내보는 건 어떨까. 하나하나 세상 밖으로 꺼내어 내 속을 비워 나가면, 기대와 희망을 쑤셔 넣을 공간이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
그때부터였다. 노트에 아무렇게나 갈긴 글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몸 대신 죽은 마음을 살리기 위해,
매일 아침 오른쪽 눈에 손을 대어도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
지금을 버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