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칭은 고정적이고 코칭은 유동적이다. 티칭은 과정과 결과가 정해져 있고, 코칭은 정해진 과정도 결과도 없다. 티칭은 지도 속 네비게이션이고 코칭은 길없는 탐험이다. 티칭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코칭은 앎에 대한 발견이다. 티칭은 일방적이고 코칭은 쌍방적이다. 티칭은 교사가 주도권을 쥐지만, 코칭은 피교육자가 주도권을 쥔다. 티칭은 교사가 말하지만, 코칭은 피교육자가 말한다. 티칭은 교사가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고, 코칭은 함께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반복된 티칭은 지루해지고 권태기가 오지만, 반복된 코칭은 항상 새롭고 설렌다. 티칭은 필연성에 관한 것이고, 코칭은 우연성에 관한 것이다. 티칭은 재현가능성에 관한 것이고, 코칭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유일한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한동안 취업 코칭을 하기 싫었다. 늙은 시간 강사처럼 맨날 하는 말의 반복때문이었다. 다양한 지원자의 특성에 맞춰 매번 다른 말을 하지만, 내게 다른 말이란 내 속에 있는 여러 말 중에서 대상자에게 필요한 말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매번 말이 바뀌지만 결국 같은 생각, 같은 말이다. 그게 싫증이 원인이다. 의약분업 전 처방전을 직접 만드는 약사와 비슷했다. 약국에 수많은 약이 있고, 환자가 오면 필요한 약을 선택해서 내어주는 일과 비슷했다. 아무리 다양하고 새로운 환자가 와도 약사의 일은 공산품으로 이미 존재하는 여러 약중에 몇몇을 골라 그때그때 조합으로 제공하는 일일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의사와도 비슷하다. 환자에게 한 번도 처방하지 않은 새로운 약의 조합을 내어 놓는 것은 위험하다. 다양한 약의 조합은 임상으로 검증된 정해진 경우의 수 안에서 선택될 뿐이다. 그런 일이 재미가 없었다. 유일한 재미란 약발이 듣나 안 듣나인데, 이는 행위의 의미를 오직 결과에 맡긴다는 뜻이다. 행위는 결과에 종속된다. 행위라는 내 삶의 의미는 현재 이 순간 나의 과정에 있지 않고 미래 타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 종속의 의미다.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코칭을 하기 싫은 것은 자유롭고 싶은 의지의 표출이었다.
취업 코칭에 대한 생각은 코로나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계기가 된 것은 큰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취준생들은 자신의 생각과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조금씩 변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잘 몰랐다. 시간을 거슬러 2000년대 취준생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졌다. 마치 오늘 아이의 모습과 어제, 그제, 일주일 전, 한 달 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별 차이가 없는데, 3년 전, 5년 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예전의 취준생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모든 취준생이 처음부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는 않는다. 채굴을 하듯 정교한 질문을 하면 대답 속에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요즘 지원자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그것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지원자를 찾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코로나가 끝나고부터는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정신과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병원 공간에서는 내밀한 자신에 대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솔직히 말하는 경험이 많아지지만, 일상 영역에서 친밀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걸 꺼린다. 통계가 없으니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진실 기반 자기소개라는 일관된 목적으로 20년 동안 취준생들을 만나온 주관적 경험으로 판단하면 확연히 ‘변했다.’ 요즘 취준생들은 예전 취준생들에 비해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타인이 어떻게 살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하든 내 알바 아니다. 감정, 생각, 행위라는 타인의 사유지에 함부로 들어가서도 함부로 관찰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취업을 하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취업의 과정이란 객관적 스펙만 준비해서 보여주고, 남들 다 하는, 정글의 수풀처럼 울창한 취업 정보들 중 일부를 채택해서 나의 생각과 말인양 보여주는 것이 다가 아니다. 기업은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게 시작이며 끝이다. 그런데 문제가 점점 커진다. 지원자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자기소개서 속에 지원자가 없다. 자기소개 속에 지원자가 보이지 않는다. 채용 인터뷰 때 질문을 주고받아도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물론 면접관은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 믿는다. 나름의 채용 형식과 나름의 판단으로 구분한다. 그게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의심하면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 진실이 무엇이건 자기 암시처럼 지원자를 안다고 믿는다. 지원자는 진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면접관은 진짜 지원자를 안다고 착각한다. 전지전능이라는 착각이거나 작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찾는 추리 과정이다. 이런 방식의 채용은 지구환경에 좋지 않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기 때문이다. 온갖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자신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그렇게 보여지고 믿어지는) AI와 비슷한 상태의 지원자와 상대해서 관심을 얻기 위해 선별, 가공, 편집한 인스타 게시물 같은 그들이 제공한 정보를 찰나의 인상과 해석으로 판단되는 면접관의 주관적 결정이 얼마나 지원자의 진실과 연결되어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자신에 대해 잘 표현하는 지원자를 만나기 점점 힘들어 힘들어진다. 스펙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자신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메시지와 전형적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기 때문인지, 그들 자신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퇴화된 근육을 움직이는 것처럼 힘든 일이라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 표현하지 않는 나만이 아는 내가 있다 해도 표현되지 않으면 그런 ‘나‘는 불투명해지고 흐려진다. 열심히 사는 삶이 자신을 퇴화시키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들 자신을 위한 삶을 추구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이나 음식점에 가서 ‘요즘 뭐가 잘 나가나요? 잘 나가는 걸로 주세요!“라는 태도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곤란하다.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취준생들이 그런 태도로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행복하면 문제가 없는데 그런 같지 않다. 행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행복하다는 사람을 별로 없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나는 그 문제의 시작이 나를 표현하지 않는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의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자기중심적 생각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자신의 정서,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표현하고 그 표현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하고 또 다시 표현해가는 과정. 그게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삶의 과정, 일의 과정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구체화된다. 가치관으로, 직업으로, 습관으로, 행위로 구체화된다. 그런 정서, 생각, 행위의 일관된 특성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자기소개를 한다는 것은 그런 나를 통해 나의 직무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두들 직무역량을 말하지만 ’나’를 말하지 않는다. 모두 나를 말하지만, 그렇게 표현된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평균의 인간’이다. 평균의 인간, 지향의 인간인 가상의 인간은 내가 아니다. 나는 점점 흐려지고 잊혀진다.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갈수록 파도에 휩쓸려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의 운명을 닮아간다.
코칭의 방법을 바꾸었다. 상대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면접은 내가 묻고 상대가 대답하는 형식이다. 질문에 잘 대답하려면 다양한 질문에 대한 대답 연습을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질문해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결론 때문이다. 대답은 질문에 종속되지만, 질문은 모든 대답에 기회를 준다. 기회란 가능성이다.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생각이란 발견이다. 그래서 코칭은 발견에 관한 것이다. 코치 입장에서 이미 있는 것, 이미 아는 것을 발견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코치도 모르는 것을 질문과 대답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발견하는 것이다. 코칭의 방법을 바꾸니 변화가 생겼다. 코칭할때마다 설레고 재미있다. 합격율도 더 높아진다. 대신 질문하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 심리학자처럼, 정신과 의사처럼 상대에게 완전히 몰입해서 정교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래서 질문하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그건 재활과 비슷하다. 질문 많던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리는 일과도 비슷하다. 어릴 때의 질문은 질문이 중심이다. 어린 아이의 질문은 질문을 하기 전까지의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없다. 대답을 듣고 난 뒤의 자신의 생각 변화를 정교하게 표현할 수 없다. 어른의 질문은 질문이 중심, 질문이 목적이 아니다. 질문은 수단이며 과정이다. 질문은 자신만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수단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취준생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뭐니뭐니해도 지원 동기다. 지원 동기는 내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동기를 질문과 대답을 통한 생각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개개인 삶의 이유 혹은 목적과 비슷하다. 구체적인 삶의 이유나 목적을 말할 수 있는 어린 아이가 거의 없듯, 자신만의 진실된 지원 동기를 말할 수 있는 취준생도 거의 없다.(돈 때문이라는 대답으로 퉁치면서 진실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취준생들도 있다. 원하는 만큼 돈을 다 벌었을 때 그 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모든 것을 이루면 그때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한 사람이 의지로 보여줄 수 있는 진실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도구를 목적과 동일시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직업교육, 취업역량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철학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암기식 죽은 철학 교육이 아니라, 생각하는 즐거움을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모든 교육이 그러해야 한다. 교육의 실패가 자기소개를 할 수 없는 지원자를 만들었다. 공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소개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표현이 거칠듯 세련되든 누구나 저마다의 마음을 담아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 지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자신에 대한 앎이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계속 뻗어나가기를. 타자와 세상에 대한 관심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자신을 돕는 일이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며, 타인을 돕는 일이 자신을 돕는 일과 연결된다는 걸 각자의 조건에서 알아가길 바란다. 그렇게 나와 세상이 주고받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아는 지원자는 자기소개서 질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지 몰라 오래오래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질문을 받든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 생각이 맞든 틀리든, 상대가 동의를 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교육의 시작은 정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극작에서 행위가 캐릭터를 만들 듯, 교육에서는 표현이 생각을 만든다. 생각이 있기 때문에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표현에 의해 발견된다. 부모든 교사든 사회든 눈치를 보며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해야 할 것 같은 말을 하는데 길들여진 아이들은 언젠가 인어공주의 운명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질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를 토론하는 교육이 되길 바란다. 삶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갯바위에 부딪혀 세상이 포말이 되지 않게. 취업코치라는 나같은 직업이 사라지게.
P.S : 작년에 준공기업에 합격한 취준생이 한 번 더 코칭을 해 달라 했다. 자신의 지향과 맞는 더 좋은 공기업으로 전직하고 싶단다. 지원자는 커피를 두 잔 사들고 왔다. 난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고맙게 커피를 마셨다. 힘센 커피다. 잠이 오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주정같은 글을 썼다. 커피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