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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샤워

by 피라

이맘때가 되면 군대생각이 난다. 제대한 때가 10월 말이다. 이등병 시절을 보낸 강원도 양구 방산면 송현리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군용 온도계는 영하 30도까지 눈금이 있었는데, 어떤 날은 빨간 눈금이 없는 날도 있었다. 일상적으로 온도계는 영하 28도에서 영하 10도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온수는커녕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도 별로 없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 막사 뒷쪽 냇가에서 식기를 씻었다. 상병 군번이 시냇물 얼음을 깨고 식기세척을 했는데, 일이등병이 밥을 천천히 먹고 식기를 냇가에 가져가면 얼음보다 차가운 시냇물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했다. 식기 세척이 끝날때까지. 그때의 고통은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두번 영하 7도 전후의 따뜻한 날이 되면 야외 수도가나 냇가에 가서 목욕을 했다. 반합에 찬물을 받아 몸과 머리에 부었다. 몸은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머리는 빠개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남쪽 항구도시 부산에 적응된 몸이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 DMZ의 겨울에 적응하려니 힘들었다. 사실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낯설고 놀라워 견디고 살아야겠다는 본능만 있었던 것 같다.


제대로 후 따뜻한 물로 샤워할때마다 군시절 겨울을 생각했다. 겨울은 길었다. 10월부터 5월까지 눈이 오는 곳이었다. 첫눈은 보통 10월 말이었고, 5월에 가끔 눈발이 날리기도 했다. 그때의 겨울, 찬물로 샤워하던 일을 잊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아서다. 따뜻한 물로 샤워할때마다 이렇게 따뜻한 샤워를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는 문명일까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때때로 추운 날에도 찬물로 샤워를 하기도 했다.


올해 3월부터는 아예 찬물로 샤워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8개월 동안 찬물로만 샤워했다. 두 가지 이유다. 옛 기억을 되살려 일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 또 하나는 머리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속설인지는 몰라도 찬물로 샤워하면 뇌세포가 활성화된다는 말을 들었다. 몸과 정신이 깜짝 놀라서 끊어졌던 시냅스가 연결되고 창의적 사고도 하게 된다고 했다. 사이비 과학의 느낌이 들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변화는 별로 없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니 효과가 있는 것일까?


어제는 잠시 망설였다. 곧 11월인데, 만병의 근원은 한기인데, 이제부터 따뜻한 물로 샤워할까하다가 습관대로 찬물로 했다. 아직 할만했다. 목표는 영하 7도가 되었을때 찬물로 샤워하는 것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할 때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몸에서 열도 나고 기분도 좋아진다. 겨울 찬물 샤워는 운동과 비슷한 것 같다. 냉수욕이 몸에 좋다는 말은 겨울에 추워서 잘 씻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씻게 만들려고 만들어낸 말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온도에 상관없이 샤워를 하고, 조건에 상관없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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