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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by 피라

공부 잘하는 아이, 잘 살아가는 아이를 만드는 유명한 이론이 있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이론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드웩박사의 주장을 만난다.


그는 말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칭찬하라고.

예컨대,

아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다. 이때 두 가지 반응이 있다. 결과와 과정 관점이다.

1. 맞아. 정답이야. 이 어려운 문제를 풀다니. 잘했어. 너는 대단해. 박수 짝짝짝

2. 이 어려운 문제인데 풀어내려고 많은 생각을 했겠구나. 그런 네가 자랑스러워.


1번은 결과에 대한 칭찬, 2번은 과정에 대한 칭찬이다. 정답인지 아닌지를 칭찬의 기준으로 삼으면 아이는 정답이라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된단다. 인정받기 위해서다. 결과를 중시 여기는 아이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도전을 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단다.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결과에 스스로 포획당하는 것이다.

반면,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 대한 칭찬을 받은 아이는 결과보다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더 의미를 둔단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에도 과감히 도전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를 알아간단다. 과정 중심으로 접근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단다. 결과에 대해 자유로워지면 결과가 좋아지는 역설이다.


육아에서의 기본 상식이다. 이 이론은 어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본다.

살다가 힘든 일, 어려운 일, 풀리지 않는 일을 만나면 저마다의 조건 속에서 분투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이란 가용할 수 있는 자원, 노력, 성향, 가치, 지향, 관계 등 한 사람 고유한 존재 자체와 그런 존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전체를 뜻한다. 이 조건은 고유해서 어떤 사람도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런 타인의 노력과정(생각과 행위로서의 노력)이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고 대단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판단한다. 판단의 기준은 결과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비난받는다. 이런 비난이 반복되면 인간은 사회에서 도태된다. 한 번도 칭찬받지 못하고 꾸중만 듣고 큰 아이와 같다. 아이와 어른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9살때는 헝겁인형이었는데 40살이 되면 강철 로봇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릴때나 늙었을때나 별반 다르지 않다. 지식과 경험은 늘었지만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어른들에게도 칭찬이 필요하다. 결과 중심의 칭찬이 아니라 과정 중심의 칭찬이 필요하다.


사업을 하다 망했을 때,

“내 그럴 줄 알았다. 넌 도대체 똑바로 하는 것이 뭐야?, 넌 참 변하지 않는구나…”

라는 말을 먹고 살아가는 어른은 쓸쓸하다. 아이처럼 펑펑 울지는 않겠지만 가슴에 큰 구멍이 난 것 같다. 결과중심의 세상이라 그렇다. 이런 세상에서는 과정은 점점 가려지고 생략된다. 급기야 과정 따위는 중요치 않다. 오직 결과로만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대단한 결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결과 속 자신만의 과정을 가슴에 품고 삶에서 퇴장한다.

삶은 고립되고 세상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그래도 고민하고 노력했잖아.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올거야. 힘내. 아니, 힘내자.”

이런 말을 많이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변화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가식적 말, 비현실적 위로, 자위, 우물 속 생각이라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요즘 회자되는 대기업 ‘김부장’과 나는 동갑이다. 결과 중심의 비교와 경쟁이 가장 심했던 71년생이다. 어제까지 같은 반이었는데, 입시 결과 발표가 나면 앞에 앉았던 친구는 오토바이를 몰며 가스배달을 하고, 뒤에 앉았던 친구는 유흥업소 보디가드로 일하고, 옆분단 3째줄 아이는 서울대 강의실에서 법전을 넘겼다. 한 공간에 있던 아이들은 단 한 번의 결과로 삶이 극단적으로 달라졌다. 우리 삶을 규정한 것은 오직 결과였다. 시험결과. 정답이 있는 문제를 풀어내는 기술.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학생이 아니라 기술자였다. 그런 기술들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1천배의 속도로 해내는 시대. 그런 시대에도 결과가 우리 삶을 규정하게 내버려둔다면 인간의 미래는 어떨까?


나에게, 우리에게, 인간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성적 올랐으니까 치킨 사줄게”, “이렇게 많은 돈을, 당신은 멋진 사람이야.”


“성적은 중요치 않아. 이번 노력의 과정에서 몰랐던 걸 알게 되었잖아. 넌 멋진 아이야”

“이번에도 실패구나. 괜찮아. 힘내.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이 있잖아. 다음에는 더 나아질수밖에 없어.”


나이에 상관없이 인간은 언제나 배우며 커나가고 있다 생각한다.


우리 자신에게 해대는 말들은 타인이 내게 한 말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타인에게 하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의 영향을 받는다.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결과의 말을 할까? 과정의 말을 할까?


위로와 보상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서의 말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나 어른이나.


세스 고딘의 말처럼 의미의 시대다.

의미를 피워내는 토양의 이름은 과정이다.


과정이 무시된 삶은 사막처럼 황량할 것이다.

막대한 자본으로 만들어진 인프라가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 세상이 사막이 된 건 아닐까?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마음이란 감옥 속에서 창틀을 타고 가끔 비치는 햇볕같은 의미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과정적 의미를 함께 나누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친구라 부르는 것 같다.


난 친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친구가 없다면 내가 나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내가 내게 그런 친구가 된다면,

그런 내게 그런 친구들이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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