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바케시디

by 피라

마늘, 추위, 음악. 군대시절 힘들었던 것 세 가지였다. 강원도 양구 DMZ의 겨울은 혹독했지만, 1년에 3달만 고생하면 되었다. 끼니마다 생마늘을 막장에 찍어먹고 싶었지만, 음식에 대한 애착이 없으니 그 또한 별 것 아니었다. 가장 힘든 건 음악이었다. 사시사철 시도때도 없이 음악이 듣고 싶었다.


휴가 나오면 좋아하는 음악테이프를 술집 주인에게 틀어달라하고 술을 마셨다. 한번은 술을 마시다가 그리이그의 페르귄트 조곡이 너무 듣고 싶어 가까운 레코드점에 달려가 전곡이 담긴 테이프를 사서 주인장에게 내일 휴가 복귀하는데 이걸 계속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그 술집의 분위기, 안주, 조명, 소음이 생생하다.


제대 후 음악을 실컷 들으며 살았다. 퇴직 후에는 소리바다라는 사이트에서 음악을 다운로드받는 것이 일과였다. 그때 많은 뮤지션을 만났다. 그 중의 한 명이 에바케시디다. 그녀가 죽은 나이가 33살, 내가 퇴직한 나이도 33살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 깊이 파고들었다.


늦은 가을에 에바케시디를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속에 내 지난 날이 한 자 한 자 각인되어 있다.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처럼. 그 동안 잘 살아 왔는지 모르겠다. 30대 중반에 삶에 대해 생각하다. 3년씩만 살기로 결심했다. 내게 미래는 없다. 앞으로 1년, 그리고 1년, 또 1년. 총 3년만 산다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그래서 3년이 지나면 새로운 3년을 살기로. 3년 기준으로 보면 너무 많은 삶을 살았다. 환생을 8번은 했다. 환생한 삶 때문인지 반복의 세월 같다.


2년전부터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남들 은퇴할 나이에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60살까지 빌드업하며 준비하기로. 환갑에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15년 정도 바짝 일하기로. 75살이 되면 죽기로. 운이 좋아 10년 정도 더 살면 편하게 일을 좀 더 하기로. 계획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에바케시디의 목소리를 들으면 삶에 진지해진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한다. 이제부터 할 일들을 생각한다. 일이 좋아 미치고 싶다. 삶이 한 달쯤 남은 자에게는 계절이 없다. 지금이 가을인지 겨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죽기 직전에도 병원에서 작은 콘서트를 하던 그녀처럼 산다면.



P.S : 에바케시디의 노래가 좋은 이유를 생각한다. 그건 그녀의 노래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그림자 깊이만큼 삶도 느껴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과 삶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다. 스쳐 사라지는 만남이 아니라, 시릴듯 아름답고 시릴듯 따뜻하게 죽음과 삶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직조된다.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카페트처럼. 삶과 죽음이, 기쁨과 슬픔이 이처럼 아름답게 공존한다. 죽어가는 자의 희망이 담긴 의지의 노래다. 우린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우린 모두 죽어가는 자라는 사실을.



https://youtu.be/xXBNlApwh0c?si=a5Gcb2MJtVeaGX8w

keyword
작가의 이전글냉정과 열정 사이